성경, 문화와 영성 (4) 예수님의 부르심 2
지난달에 이어 우리는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의 배경이 되는 복음서의 본문을 해석하고,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그림의 의미를 묵상하고자 한다.
■ 마태오를 부르시다
○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은 예수님이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 마태 9,9의 본문인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본문의 문학 장르는 하나의 소명사화(召命史話)이다. 본문은 상황묘사, 부르심, 응답의 문학적 구조를 가진다. 상황묘사(9ㄱ절)에서는 사건이 일어날 공간적인 배경이 제시되고 등장인물들이 소개된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보셨다. 즉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시기 전에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보셨다. 그는 세리의 일을 행하고 있었다. 부르심(9ㄴ절) 부분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직접 인용된다. “나를 따라라.” 그분의 초대에서 “뒤따르다” 동사가 사용된다. 이 동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를 의미한다. 응답(9ㄷ절) 부분에서 마태오의 행동은 “일어서다”와 “뒤따르다” 동사로 표현된다. “일어서다”는 그 이전 삶의 방식의 버림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과 뒤따름의 상관관계를 발견한다.
○ 우리 본문에서의 변화는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오가 일어나 예수님을 뒤따른 것이다. 이 변화는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것은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초대에 의해 일어났다. 즉 예수님과 제자의 만남에서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세리의 긍정적인 응답에 의해 일어났다. 이 응답은 예수님 없는 삶을 버리고 그분과 관계있는 삶, 즉 그분과의 공동체에로의 선택을 의미한다.
○ 복음서 이야기(story)에는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하는 등장인물들(characters)이 망라되어 있다. 사회 계층의 상층부에는 예루살렘의 귀족들과 같은 지배 엘리트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종사하는 이들로는 백인대장, 군인들, 세리들이 있었다. 세리는 유다인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사람들은 세리를 싫어했고 멸시했다. 세리와 죄인들은 거룩하지 않은 이들, 깨끗하지 않은 이들, 율법의 윤리적 요구를 지키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탁에서 배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더러운 영으로부터의 해방을, 병의 치유를, 죄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그 누구와도 거리를 두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베푸신다.
예수님과의 친교는 특히 그분과의 식탁 공동체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먹고 마심”으로써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구원의 자리가 되게 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의 식탁 공동체에서 친교와 나눔을 실천하셨다.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는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열린 공동체였다.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과의 식탁 공동체에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즉 사람다움이 실현되는 세상인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식탁 공동체의 친교에서 그것을 몸소 실천하셨다. 예수님은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의 경계에 의해 배제되고 소외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교를 나누시고 그들과 “함께 느낌(共感)”, 즉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를 실천하셨다. 예수님에게는 일체의 차별과 경계, 분리와 배제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 즉 “함께 아파하기”가 더 큰 가치였다.
○ 우리 본문에 뒤이은 본문인 마태 9,10-13에서 예수님은 마태오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다. 이 식탁 공동체는 반대자들인 바리사이들의 비판을 받는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1절) 이에 예수님은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고 당신의 사명을 밝히신다.
○ 우리 본문을 읽는 오늘의 그리스도인 독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뒤따라 나섰던 제자들의 행동에 공감(共感)하게 된다. 복음서의 제자들이 부르심과 응답을 체험했듯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독자는 제자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과 동일화(同一化)한다. 이와 같이 제자의 탁월한 모범에 독자는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리고 뒤따르기의 모델인 제자들의 모습에서 독자는 자신의 현실을 되돌아 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그분을 뒤따르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어디이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뒤따르기 위해 일어나야 할 곳은 어디인가?
■ 프란치스코 교황의 묵상
○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3년 8월의 언론 인터뷰에서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에 묘사된 부르심 받은 마태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손가락은 마태오를 가리키고 있어요. 그는 바로 저예요. 저는 마태오에 공감해요. 그런데 마태오의 동작이 제 마음을 울려요. 그는 돈을 붙잡고는 ‘아니에요, 나는 아니에요! 이 돈은 내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 프란치스코 교황은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부르실 때 여전히 탁자에 앉아 머리를 숙여 돈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를 세리 마태오로 해석하신다. 교황은 마태오와 공감하신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나의 것, 나의 가치, 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가?
○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3년 7월 5일의 미사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리들은 이중으로 죄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에 집착했고, 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보시고 자비로이 응시하십니다. 마태오는 그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을 느끼고 놀라워합니다. 그는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듣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태오는 기쁨에 가득찼지만 또한 의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돈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오는 여전히 돈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마태오가 ‘예’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나서는 데는 한순간이면 족했습니다. 그 순간은 자비를 살고 자비가 주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것은 만남의 첫 순간이고 깊은 영적 체험의 순간입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5년 4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c/caravagg/04/23cont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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