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의 세계: 정경(正經) 이야기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입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한 사람 |1|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04-12 | 조회수5,244 | 추천수1 | |
[성경의 세계] 정경(正經) 이야기 (1)
초대교회 구약성경은 70인 역이었다. 희랍어로 쓰였기에 민중이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유다인만 히브리어 성경을 사용했다. 당시는 구약성경 목록이란 것이 없었다. 따라서 성경으로 인정받는 문서도 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확실한 성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성경은 지역마다 목록이 조금씩 달랐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 한 분파로 여겨졌기에 성경에 대한 결정은 유대교 랍비들이 쥐고 있었다.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코르넬리우스를 입교시키고(사도 10장) 그들과 가까이 지냈다. 초대교회 주도권을 쥐고 있던 유다인은 베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방인과 절친한 걸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베드로는 지지 기반이 약해 명목상 수좌로만 있었고 실제 교회를 이끌었던 분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였다. 그의 율법주의 태도는 바오로와 마찰을 겪기도 했지만 유다인은 좋게 봤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란 칭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로마에 의해 제일 먼저 순교한다. 이후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초대교회는 변화를 겪는다. 우선은 주도권이 이방인 교회로 옮겨간 것이었다. 바오로가 개척한 소아시아 교회와 로마교회였다. 자연스레 유대교 그늘에서도 벗어났다. 그러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갈등관계로 돌아선다. 당시 히브리어는 죽은 글자였다. 랍비들이 권위를 누리는 전유물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유다인은 바빌론 유배 때 습득한 아람어를 사용했다. 팔레스티나로 돌아오지 않은 유다인은 희랍어를 사용했다. 이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희랍어로 번역한 성경이 인 역이다.
마침내 유대교는 초대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회의를 연다. 기원후 90년 열린 얌니야 회의다. 랍비들은 유대교 경전을 본격적으로 정리했다.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예언서와 그 밖의 경전을 정경으로 확정 짓는 작업이었다. 핵심기준은 해당 문서의 히브리어 원본의 존재 여부였다. 다시 말해 희랍어로 번역된 70인 역에서 번역된 문서의 히브리어 원본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70인 역엔 있고 히브리어 원본이 없는 6권의 성경을 위경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타나크(TANAK)라 불리는 유대교 구약성경이 결정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70인 역을 부정했고 70인 역을 사용하는 초대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해 유대교에서 제거하였다. [2015년 4월 12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정경(正經) 이야기 (2)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다. 이후 초대교회는 급성장한다. 덩달아 문제점도 나타났다. 지역 교회들이 로마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교회를 앞세워 독립을 꾀하려는 민족주의도 등장했다. 보편교회를 하나로 묶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 기준은 성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경전에 대한 정리 작업이 궤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성경 목록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동서교회는 갈등을 겪는다.
로마중심의 서방교회는 70인역을 전부 성경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달랐다. 유대교 경전인 타나크와 일치하는 목록만 인정했다. 동방교회 주장을 대표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정경(正經)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정경은 희랍어 카논(cannon)의 번역이다. 원래는 갈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고대 희랍에서는 갈대를 자(尺)로 사용했기에 표준 또는 기준이란 의미로도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70인역 전통을 재확인한다. 이렇게 해서 교황 다마소 1세는 70인역 성경을 라틴어로 새롭게 번역했다. 예로니모가 완성한 불가타 성경이다. 구약은 유대교 히브리어 성경(타나크)에서 직접 번역했고 신약은 70인역을 자료로 삼았다. 이후 서방교회는 2차 카르타고 공의회(419)를 통해 70인역 전체를 정경으로 선언한다. 동방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대교회엔 주님을 직접 봤고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많았다. 이들의 증언으로 교우가 된 이들도 많았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땐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시는 줄 알았다. 어느 누구도 보존을 목적으로 글 쓸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나고 사도 시대가 끝나자 숱한 이단의 책들이 등장했다. 저자도 알 수 없고 내용도 조잡한 책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신약의 정경작업이 시작된다.
신약성경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편지와 예언서로 나눌 수 있다. 편지의 경우 교회나 개인에게 전달되었고 지역교회에서 읽혀졌다(골로 4,16). 그리고 일정 기간 후 사본들이 모여 책으로 묶였다. 많은 문서 가운데서 정경으로 선택된 첫째 이유는 공적 예배장소에서 읽혔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신약 정경 27권의 목록 역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아타나시오가 처음으로 마련했다. AD 367년 자신의 교구 여러 교회에 부활 서신을 보내면서 오늘의 신약성경 27권과 동일한 목록을 제시했다. AD 397년에 열린 제3차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경 정경을 확정했다. [2015년 4월 19일 부활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정경(正經) 이야기 (3)
초대교회 당시는 성경으로 공인된 책이 없었다. 정경이란 용어도 없었다. 무엇이든 예수님에 관한 글이면 공적 장소에서 읽혔다. 사도와 그들을 돕던 이들이 남긴 글이었다. 로마의 박해를 견디면서 이 문서들은 힘이 되었다. 로마 밖의 지역 교회도 돌려가며 읽었다. 시간이 지나자 엉뚱한 책이 등장했다. 예수님에 관해 정통교회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다. 훗날의 이단(異端)들이다.
교회는 어떤 문서가 정통성을 지니는지 논의했다. 표준은 예수님일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가르침과 다른 것은 제외했다. 이렇게 해서 숱한 논란을 거친 뒤 정경 27권이 등장했다. 정경이란 용어 역시 이때 만들어졌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목록을 직접 작성해 지역교회에 배포했다. 이후 공적 장소에서는 정경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시는 외부 핍박이 많았다.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는 기독교 문서를 모두 없애라는 칙령을 내린다. 영향은 대단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서들이 사라지고 극히 제한된 문서만 살아남은 것이다. 자연스레 흩어진 문서를 수집해 전체를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 역시 정경의 출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정경 작업은 마르치온(Marcion)이란 사람에 의해 시도된다. 85년 터키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뛰어난 사상가였다. 교회가 로마와 대치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제국과 연합해 공존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나름대로 목록을 만들고 마르치온 정경이라 불렀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를 자극했고 정경작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치온은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을 구분했으며 구약의 하느님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학설은 이단이 되었고 추방되었다. 하지만 정경작업은 분명 획기적인 도전이었다.
정경의 기준은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이냐 아니냐에 있었다. 사도와 함께 일한 사람이 쓴 것도 기준이 되었다. 이렇듯 정경의 키워드는 사도였다. 예수님의 직제자는 아니지만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을 부여한 데는 이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모두 1세기 이전 기록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300년 동안 정경으로 결정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다는 반증이다. [2015년 4월 26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이민의 날)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