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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4: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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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22 조회수5,077 추천수1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04]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계약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은(창세 15장; 17장), 이집트 탈출 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체결하실 ‘시나이 산 계약’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탈출 6,8; 24,1-11).

이는 창세 15장에 이미 암시되었는데, 계약 체결을 준비하던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반으로 쪼개자 맹금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손으로 그 새들을 쫓아냈다(11절).

맹금의 출현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일종의 복선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새들을 쫓음으로써, 종국에는 그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이것은 창세 15,13에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통보되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 파라오들은 흔히 호루스 신의 상징인 ‘독수리’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강제 노역

요셉을 알지 못한 새 파라오가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히브리인들의 빠른 번성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강제 노역으로 이스라엘을 옭아매고, 아들을 낳을 때마다 죽인다(탈출 1장). 그러자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24).

성경에서 ‘기억하다(자카르)’라는 히브리 동사는 잊은 것을 생각해 내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고려하다’, ‘숙고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을 포함한다. 곧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계약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기에 앞서, 성조들 이후 처음으로 모세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셨다(탈출 3,14;6,3).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주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 곧 ‘에히예 아셰르 에히예’였다. 히브리 알파벳이나 발음으로 볼 때, 이 이름은 ‘야훼’라는 이름과 관계가 깊어 보인다. 곧 동일한 어근으로 구성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곧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탈출 20,7; 신명 5,11), 유다 사회에서는 지금도 ‘야훼’라고 직접 발음하는 것을 피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 이름을 구성하는 알파벳 ‘유드헤 바브헤’로 풀어서 발음하거나,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로 읽는다. 그러다보니 본디 발음이 잊혀져, ‘야훼’일 것이라고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야훼’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존재하게 하시는 이’라고 풀이하는 방법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곧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암시해 준다. 반면,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신 “나는 있는 나다.”라는 이름은 일인칭이기에, 주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그 대상에 대한 지배권을 뜻하므로(2열왕 24,17 참조), 주님의 이름이 일인칭으로 표현된 것은 스스로 존재하셨음을, 곧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창조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이름은 ‘야훼’와 더불어, 주님께서 삼라만상을 지으니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준다.

탈출기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은, 불타면서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탈출 3,2)나 이집트에 내린 초자연적인 ‘열 재앙’(탈출 7,14-12,36), 그리고 ‘홍해를 가르신 사건’(탈출 14장)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대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형상으로도 초월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온전히 담을 수 없기에, 십계명은 ‘신상’ 제조를 엄격하게 금지했다(탈출 20,4; 신명 5,8). 이것은, 신들의 동상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던 고대 근동 주위 나라들의 관습을 견제하려 함이었다(시편 115,4; 이사 40,19-20 등 참조).


안식일, 시나이 산 계약의 표징

“안식일”은 시나이 산 계약의 “표징”이다(탈출 31,13). 아브라함 계약이 “할례”로 몸에 새겨짐으로써 “표징”이 되었듯이(창세 17,11), 이스라엘은 매주 안식일이 되면 시나이 산에서 주님이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음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본디 안식일은 ‘천지창조’를 기념하는 날이지만, 십계명에도 안식일 준수가 규정되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안식일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삼라만상이 완벽했기에 이레째 휴식을 취하신 데에서 비롯되었으므로(창세 2,2-3), ‘하느님의 안식’은 ‘세상이 평화롭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탈출 20,11은 ‘천지창조’를 기억하려고 안식일을 규정한다.

그런데 신명 5,15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의미로 안식일 준수를 명한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에서는 안식일을 통하여, ‘이집트 탈출’(=하느님 민족의 탄생)이 ‘천지창조’(=천지의 탄생)와 동등한 위상을 부여받는 셈이다.

안식일 준수를 통해 이스라엘은 창조 질서 보전에 참여할 수 있으며, 안식일을 깨뜨리면 그 질서에 해를 끼친다. 안식일 파기로 창조 질서가 깨지면, 이스라엘은 자기 자리인 고향에서 쫓겨나는 재앙도 피할 수 없다(예레 17,19-27).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재앙을, 땅이 불모로 변하고 하늘에는 빛이 사라지는 등, 태초의 ‘혼돈’이 되돌아오는 것으로 표현했을 것이다(예레 4,23-26). 안식일이 이처럼 창조 질서 보전에 직결되므로, 주님은 그것을 시나이 산 계약의 표징으로 삼으심으로써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성별(聖別)하셨음을 보여주셨다.


조건부 계약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과 많은 후손들을 약속하신 이래, 아브라함 계약은 시나이 산 계약을 체결하는 배경이 되어준다(탈출 6,8; 24,1-11).

그러나 아브라함 계약은 조건 없이 영원토록 유효한 계약인 반면(창세 17,19), 시나이 산 계약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파기되는 ‘조건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의를 증명한 뒤에 하느님과의 계약을 선물처럼 받았으나(창세 15,6; 느헤 9,8), 이스라엘은 계약이 체결되고 난 뒤 자신들의 신의가 변함없음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 준수’라는 ‘조건’으로 반영되었다.

게다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출해 주셨기에, 이스라엘은 감사하는 의미로 주님께 충실하고 계약이 동반하는 의무와 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

그래서 탈출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되었으며, 계약에 딸린 율법들을 왜 지켜야 하는지 당위성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탈출 6,20-25 참조). 곧 함무라비 법전 등의 고대 근동 법률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인 반면, 모세오경의 법전은 주님께서 직접 주셨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탈출기의 기적을 계기로, 모세오경은 주님을 섬겨야 할 ‘장소’와 합당한 ‘전례’, 제사를 인도할 ‘사제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주님 말씀을 선포하고 이끌어줄 ‘예언자직’을 세운다.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시나이 산 계약은 여러 율법들 가운데 특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명한다(신명 6,5).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의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측정이 어려운,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 제정된 시대의 당사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진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제껏 발굴된 고대 근동의 비문과 유적들을 통해 얻을 수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고대인들의 ‘사랑’은 주군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다. 곧 고대 근동에서는 ‘사랑’이 일종의 전문용어로서, 정치적인 맥락에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다.


주군을 향한 사랑

이집트에는 ‘아마르나’라 불리는 유적지가 있다. 아마르나는 한때 이집트를 뒤흔든 종교혁명의 중심지로서, 이집트 고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신을 섬긴 파라오가 수도로 삼은 곳이다.

기원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톤이 태양신 아톤만을 숭배하며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으므로, 다신을 섬긴 전통 종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그래서 아마르나 시대는 짧을 수밖에 없었으나, 성경 연구에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가나안과 이집트를 오간 서신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서간들은 ‘아마르나 편지’라 불리는데, 고대 가나안과 이집트의 상황을 적나라하고도 다양하게 보여준다.

당시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예루살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이 서간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내용이 바로 파라오에 대한 사랑이다. 가나안 봉신(封臣)들은 파라오를 ‘사랑’해야 한다고 써있기 때문이다. 곧 그네들에게는 파라오에게 ‘충성’하는 것이 파라오를 향한 ‘사랑’이었다.

‘아마르나 편지’뿐 아니라,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를 다스린 ‘에사르 하똔’ 임금의 비문도 주의를 끈다.

그는 봉신 국가들에게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도록 명했는데, 이 또한 주군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다. 곧 고대 근동인들은 우리와 다르게, ‘사랑’을 ‘충성’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벗

성경에는 신명 6,5 외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는 구절이 많다. 대표적 예가 바로 이사 41,8; 2역대 20,7로서,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벗’이라 부른다. 이사 41,8을 보자. “나의 벗(오하비)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여기서 “나의 벗”을 직역하면, ‘나를 사랑하는 이’다. 곧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충절을 지킨 이’라는 의미가 되어, “벗”이라는 표현 속에 한결같은 신심이 함축되었다.

그래서 같은 배경으로 요한 21,15-19을 읽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에 발현하여 베드로에게 물어보신 세 번의 질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신 의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한지를 묻는 추상적 의미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에 대한 신의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었다.


제2의 탈출과 새 계약

이집트 탈출의 기억은, 기원전 6세기 초 유다 왕국이 망하여 바빌론으로 유배가는 시대에 대표적인 ‘구원’ 동기가 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고향에서 쫓겨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했던 비슷한 시대 배경 아래에서,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훗날, 제2의 탈출과 가나안 재상속이 일어날 것을 예고했다(예레 29,12-14; 32,37-38; 에제 20,34-36; 34,11-16; 36,24-38 등).

또한 아브라함 계약에 기초하여, 파기된 시나이 산 계약 대신 ‘새 계약’이 다시 체결될 것임을 선포했다(예레 31,31; 에제 34,25; 37,26).

‘시온 귀환’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여 정치권의 판세를 뒤집었을 때 이루어졌으며, 유다 민족은 즈루빠벨 등을 선두로 귀환하여 제2성전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에즈 1,11; 2,2 등 참조). 그리고 ‘새 계약’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었다(마르 14,24).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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