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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19: 자기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1열왕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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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27 조회수3,396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19) “자기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1열왕 15,3)


현명했지만 훌륭한 왕이 되지 못한 솔로몬



우상에 빠진 솔로몬, G.B. Venanzi.


열왕기에는 “다윗의 마음과는 달리” 또는 그와 비슷한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윗인데 대부분의 임금들이 낙제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가 솔로몬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지혜와 영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여 받았고 매우 부유했으며 7년에 걸쳐 성전을 지었다는 것도 압니다. “솔로몬 임금은 부와 지혜에서 세상의 어느 임금보다 뛰어났다”(1열왕 10,23).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같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1열왕 11,4).

솔로몬을 부정적으로 보는 첫째 이유는 그가 외국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판관 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땅의 주민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따라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여러 나라의 수많은 여자를 데려왔고 그래서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7년 동안 성전을 짓고 13년 동안 궁전을 지으면, 그 일은 누가 하고 그 비용은 누가 냅니까? 다 백성들입니다. 임금은 영화를 누려도 백성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예언자 아히야가 예로보암의 반란을 예고하며,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솔로몬에게서 돌아서리라고 선언합니다(1열왕 11,26 이하).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시하는 신명기계 역사가는 그것이 솔로몬이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북쪽의 열 지파와 남쪽의 두 지파가 갈라진 데에는 지역 감정이 작용합니다. 솔로몬이 조세와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티로 임금 히람에게 재목을 받고 북부 성읍 스무 개를 떼어 주었을 때 북부 주민들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그가 이렇게 백성들의 불만을 키워 놓았기에, 그의 사후에 일어난 왕국 분열은 그의 탓이 컸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입니다. 다윗이 영토도 가장 넓게 확대해 놓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그저 외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한 분 하느님만을 섬기지 못했기에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그는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지도 않았다”(1열왕 11,33). 이것이 흔히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솔로몬에 대한 신명기계 역사가의 평가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니 아들 르하브암이 임금이 됩니다. 예로보암이 그를 찾아갑니다. 부역과 조세를 줄여 달라는 것입니다. 르하브함은 거부하고, 왕국은 분열됩니다. 예로보암은 북부의 열 지파와 함께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르하브함에게는 남쪽의 두 지파만이 남습니다. 이후로 북왕국에서는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게 되고, 남왕국에서만 다윗 왕조가 멸망 때까지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로보암의 금송아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생각하니, 백성이 명절이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민심이 예루살렘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성소를 세우고 금송아지를 하나씩 만들어 놓습니다. 본래 의도는 다른 신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야훼 하느님을 섬기려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백성은 쉽게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또 평가를 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르하브암이 잘못했습니다. 집회서에서도 그는 우둔하고 지각이 없었으며 그의 정책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47,23). 그때라도 백성의 부담을 줄여 주었더라면 솔로몬 통치 기간 동안 생겨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에서는 별로 르하브암을 탓하지 않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은 예로보암입니다. 베텔과 단의 성소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모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흐리게 한 그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이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모두 신명기계 역사가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예로보암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남왕국 유다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임금은 히즈키야와 요시야 정도뿐입니다.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만점에 가까운 답안지는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만연했던 우상 숭배를 없애고, 점쟁이와 영매 등을 금지했습니다.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그는 종교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으려면 정치적으로도 독립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히즈키야와 요시야는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임금들이기도 합니다.

평가 기준의 문제를 되짚어 봅시다. 열왕기 저자는 신명기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왕정을 돌아봅니다. 그러기에 외적인 업적은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훌륭한 임금의 조건이었습니다. 군마를 늘리고 아내를 늘리고 금과 은을 모은 솔로몬은 훌륭한 임금일 수 없었습니다(신명 18,14-20 참조).

[평화신문, 2015년 4월 26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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