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43) 카이사리아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세례 베풀어
- 카이사리아는 헤로데가 로마에 충성의 표시로 건설한 지중해 대표적 항구로, 초대 교회 이방인 선교의 거점 도시였다. 사진은 헤로데가 건설한 카이사리아 전차 경기장 유적. 리길재 기자
카이사리아는 사마리아 북서쪽 텔아비브와 하이파의 중간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에 건설된 항구 도시다. 이곳은 더운 여름에도 지중해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고 마음이 상쾌해진다.
카이사리아는 로마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예수님 시대 유다 지방의 로마 행정 도시였다. 그런데 원래 이곳은 고대 페니키아인 정착지였는데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이 도시를 점령해 자치제를 허용했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이 땅을 하사받은 헤로데는 기원전 25년부터 12년간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항구를 완성했다. 그리고 헤로데 왕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에게 아름다운 도시와 항구를 지어 헌정하면서 ‘카이사리아’로 명명했다.
그로부터 카이사리아는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 항구가 됐고 로마 총독부와 군대 주둔지가 됐다.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 아주 큰 도시를 이뤘다. 로마 시대에는 무역항의 특징답게 여러 종류의 인종들이 섞여 살았으며 다양한 종교와 사상들이 쉽게 유입됐다.
카이사리아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또 다른 중심지였다. 195년경 현재 공의회 제도의 기원이 된 최초의 공의회가 열린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카이사리아는 백부장 코르넬리우스 이야기에 등장한다. 베드로가 환시를 보고 로마 백인대장이면서 이방인이었던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다. 이 사건은 할례 없이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결별하는 중대한 사건이 됐다. 이제는 인간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사도 10,1-48).
또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예언서와 예수님에 관한 복음 말씀을 설명해 준 다음 세례를 주고 아스돗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6-40).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카이사리아에 있는 필리포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머물렀고(사도 21,8),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사도 21,16). 그 이후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붙잡혀 유다인들은 그를 죽이려 카이사리아에 있는 총독에게 데려갔다(사도 23,23-35). 바오로 사도는 카이사리아를 세 번이나 방문했으며, 특히 마지막에 로마로 이송되기 전 2년간(58~60년) 이곳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로마로 압송돼 갔을 정도로 사도 바오로와 연고가 깊은 도시다.
카이사리아는 비잔틴 후기와 아랍의 통치를 받으면서부터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와 이슬람에게 점령되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슬람에게 점령되기 전 이 도시에는 유다인 2만 명과 사마리아인 3만 명이 살았지만 이슬람의 통치 기간 중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카이사리아가 발굴돼 과거의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 현재 성벽, 극장, 전차 경기장, 신전 등과 인공적으로 만든 방파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카르멜 산에서부터 식수 공급을 위해 물을 끌어온 수도교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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