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22)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루카 1,70)
멸망이 구원의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해
왕정 시대에 예언서들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입니다. 이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언서 일반에 대해 한 가지를 짚어 두려 합니다.
예언이 무엇이고 가짜 예언은 무엇일까요? 가장 흔한 오해는 예언이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천문학에서 일식과 월식을 예고하면 그것도 예언일까요? 일기예보도 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일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추측이나 점술, 그 밖의 어떤 인간적 기술에 의한 것일 때에는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성경 예언의 많은 부분은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고 계신지를 전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그리스 같은 고대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신탁들의 경우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어떤 말이 예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말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 14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서, “나는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말한 적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예언과 참된 예언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인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말인가에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아닌데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것이 거짓 예언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서도 예언서의 구절들과 비슷한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무수히 반복되며 그저 습관처럼 읽고 지나갈 수 있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구절에 예언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대변인, 하느님의 입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을 전후로 크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각각의 시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예언서가 유배 전 시기에 속하고 어떤 예언서가 유배 후 예언서인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표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예언서들은 연대를 정확히 말할 수가 없고, 어떤 예언서들은 편의상 약간 틀린 위치에 넣었습니다(오바드야서). 그리고 다니엘서의 경우 예언자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다니엘서의 작성 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추정할 뿐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에제키엘을 분기점으로 하여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크게 변화됩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유배 전의 예언자들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고하고, 유배 후의 예언자들은 주로 그 회복과 구원을 알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유배 전에 생겨난 예언서들도 그 후에 재해석과 편집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책 안에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모두 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가르침에 따라 살도록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며,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이사야, 미카,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에서, 멸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절박하게 회개를 촉구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도 남왕국 유다도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지 않으며 결국 먼저 이스라엘이, 이후에 유다 왕국이 무너집니다.
유배 중에 예언의 어조는 바뀝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심판이 다가오는 것을 말했다면, 이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용서와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회복을 예고합니다.
이후의 예언자들, 특히 귀향 후의 예언자들도 올바른 삶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멸망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현세적 재건을 넘어선 종말론적 구원의 전망도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전체적 흐름은 심판과 멸망,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배를 더 넓은 전망 안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유배 이전 예언자들의 설교를 듣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예언자들은 실패한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점에서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멀리서 바라볼 때 이스라엘의 구원은 멸망하기 이전에 회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배를 통하여, 철저한 실패를 겪은 다음에 이스라엘은 구원은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이것이 비로소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은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여러 달 동안 보게 될 내용의 요약입니다.
“당신께서 한 처음에 창조하신 이들을 증언해 주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선포된 예언들을 성취시켜 주소서”(집회 36,20).
[평화신문, 2015년 5월 17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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