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기도]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의 청원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 해설 4
‘주님의 기도’의 후반부(마태 6,11-13)에는 제자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올리는 네 가지 청원이 나온다. 이 가운데 이번 호에서는 두 가지만 다루겠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이 청원의 그리스 말 원문을 직역하면 “일용할 우리의 빵을 오늘 저희에게 주소서.”이다.
‘우리를 위한’ 첫째 청원(마태 6,11)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필요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형용사 ‘에피우시오스’의 뜻이 분명하지 않다. 이 형용사는 그리스어로 쓰인 성경 밖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복음사가들이 새로 만들어 쓴 것 같다. 그래서 고대 교회부터 언어적 분석을 근거로 이 형용사에 대한 해석이 몇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일용할 빵”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당일의 빵’, ‘다가오는 날의 빵’, ‘초실체적(라틴어 super-substantialis, 이 해석에는 빵을 ‘성체’와 관련지어 보거나,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먹게 될 잔치의 빵’[루카 14,15 참조]과 관련지어 보는 해석도 포함된다.) 빵’, ‘실존(존재)에 관한 빵’ 등으로 해석되었다. 이 가운데 오리게네스의 해석 전통을 따르는 마지막 해석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의도했던 것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해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마태 4,4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물질적 빵(음식)만은 결코 아니다. 삶의 의미를 밝혀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영적인 빵도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영적인 빵’으로 해석할 때에도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는 ‘빵’의 일차적 의미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빵’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오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청하라고 하셨지, 차고 넘칠 양식을 청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탐욕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마태 6,24.34; 루카 16,19-31; 1티모 6,10 참조). 광야 여정[광야 유랑] 중 경험한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굶주림 속에서 울부짖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탐욕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였다(특히 탈출 16,4.18-20 참조).
이 지구에는 아직도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도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이 기도의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그것도 ‘차고 넘치도록’ 청원만 한다면, 이런 태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도문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다.
그러나 인간 삶에는 물질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필요도 있기 마련이다.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 나오는 ‘죄의 용서’는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다. 먼저 분명한 것은 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므로, 죄의 용서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기도로 청하여야 할 성격의 것이다.
“용서를 청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당신의 제자들도 늘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6,14 이하 참조)이 전제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죄뿐 아니라, 단체적으로(집단으로, 민족으로, 국가적으로) 지은 죄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또한 인류가 저지른 그 끔찍한 폭력의 역사와 그 폭력의 결과로 신음하고 있는 상태를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 번역에서 ‘잘못’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빚’이다. 이 청원에는 ‘죄’가 ‘빚’이라는 은유로써 표현되어 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을 빚을 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남아있다. 이렇게 죄를 ‘빚’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람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호바’라고 발음되는 아람어는 ‘빚’을 뜻하기도 하고, ‘죄’를 뜻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용서하다’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동사는 ‘(빚을) 탕감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다. ‘빚과 죄’라는 이런 이중적 의미는 마태 18,23-35의 ‘매정한 종의 비유’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종은 자신은 1만 탈렌트(=6천만 데나리온)나 빚을 졌다가 자비로운 주인에게 탕감받았으면서도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무자비하게 대한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삶 전체는 파괴의 세력인 죄와의 투쟁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최후 만찬의 전승에 나오듯이, 그분의 죽음은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것(마태 26,28 참조)이었다. 그리고 마태 1,21에 따르면,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표현들은 죄의 세력이야말로 인간의 비구원적 상황의 가장 깊은 뿌리로 이해되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런데 죄는 하느님과 친교뿐 아니라, 인간 상호의 친교를 감소시키거나 파괴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전반적으로 공동체 구성원 상호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를 얻는데, 언뜻보면 거의 조건처럼 느껴질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마태 6,14-15; 18,21-35).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이 청원에서 ‘우리가 하는 용서’가 과거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잘못한 이웃의 죄를 용서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점은 마태 5,23-24에 나오는 가르침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용서의 청원을 너무 좁게 해석하여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푸는 용서만큼,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는다거나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했으니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연히 용서하셔야 한다는 식의 계산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신앙인의 처지에서 보면, 하느님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이며,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총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를 용서할 때에, 그들은 각자 주님께 ‘자비의 용서’를 이미 받은 사람으로서 용서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 3,13; 에페 4,32 참조). 그 누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적이 없는 상태에서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자신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했으니”라는 청원에서 “용서했으니”에 나오는 과거형에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아람어의 완료형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면, “용서했으니”라는 말의 ‘과거 시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일상 언어였으며,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일상 언어로 사용하셨을 아람어와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 문법의 경우, 우리가 편의상 ‘완료형’이라고 부르는 시제는 그리스어에서와는 달리, 반드시 과거에 완결된 행위만을 두고 말하지는 않고, 때에 따라서는 행위와 말함의 동시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루카 복음서(11,4)에 나오는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청원은 아람어가 가지고 있던 본디 의미를 살린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디다케(공식 명칭은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다. 2세기 초[늦어도 110년 이전]에 시리아에서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은 아니지만, 고대 교회의 사정을 일부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8,15에도 “우리가 용서하듯이”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도문의 ‘주님의 기도’에서 다른 부분은 다 마태오 복음서를 따르면서도 ‘용서’에 관계된 부분에서만은 루카 복음서의 본문을 더 따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기준이 되는 라틴어 미사 경문에 “용서하듯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이 청원에서 “용서하오니”라는 말의 현재형도 용서를 받으려면 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산상설교 전체의 가르침이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오는 여러 가지 윤리적 요구들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먼저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와 사랑을 근거로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행동 이전에 먼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하시려 해도, 그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조건(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 막고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를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최근 「로마서」(성서와 함께, 2014년)를 저술했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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