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서간들] 요한의 편지들이 전하는 가르침과 지금의 우리
요한의 편지들은 구체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의 공동체와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그리고 분열이라는 배경입니다. 이 배경에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하려고 기록한 이 편지들은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하지 않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생각하게 합니다.
야고보 서간처럼 특별히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의 실생활을 위해서는 더욱 의미가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편지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체험의 가능성
요한의 편지는 시작부터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1요한 1,1). 물론 이러한 체험의 바탕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 오셨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요한1서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의 가능성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모습을 보고 또 다른 이들의 증언을 통해 그분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육화(강생)입니다.
요한의 편지들은 이것을 시작점으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믿음의 내용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고백 안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머묾과 친교
요한의 편지들은 그분과의 친교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친교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성서적인 표현으로는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표현 이상입니다. 머물러 있는 것은 믿음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요한의 편지들은 가르침을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가르침, 곧 계명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머물게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렇기에 친교를 맺고, 머물러 있는 것은 이미 실천적인 면을 포함합니다. 계명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기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일컫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은 바로 이 관계입니다. 구원을 위해,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기도하고, 전례에 참석하는 것 등은 이 관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심활동 또한, 나와 하느님의 관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와 이웃의 관계입니다. 여러 가지 봉사활동, 자선의 실천 등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고 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온전하고 바른 신앙은 이 두 가지 측면이 잘 조화될 때 가능합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 신심활동에만 몰두하거나, 반대로 전례에는 충실히 참석하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으면서, 이웃에 대한 실천적인 면만 집중하는 것도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의 편지들이 말하는 머묾과 친교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
신앙의 두 측면에서 요한의 편지들은 ‘형제적 사랑의 실천’을 더 강조합니다. 이것은 이미 보았던 것처럼 공동체가 겪은 문제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신앙적인 면을 소홀히 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저자의 생각은 믿음을 실천하는 것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던질 수 있는 질문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라는 단순한 질문은 믿음과 실천이 갖는 관계를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보면 그 시작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편지들은 그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바른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미움을 간직하고, 형제들을 미워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고,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간직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사랑은 믿음의 실천이자 열매’입니다.
식별의 필요성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로운 종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요한의 공동체가 겪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식별을 요구합니다. 과연 바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들이 지향하는 것이 하느님인지 아닌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고 계명을 실천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식별은 공동체 안에서 바른 믿음을 구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인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믿음과 실천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실천을 통해, 행동을 통해 이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우리는 식별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지만 삶 안에서 믿음을, 계명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바른 믿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요한의 편지들을 마치며
우리는 교회를 신앙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그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구원을 향한 공동체의 삶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요한의 편지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편지들에 대해서 쓰면서 어쩔 수 없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삶이 윤택해지고, 가정 공동체는 더욱 작아지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조금씩 개인적으로 바뀌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여러 다른 난관은 다른 이들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모습은 단지 사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많은 분이 ‘마음의 평화’라고 답합니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내 마음의 평화일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은 ‘나와 하느님의 관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요한의 편지들이 말하는 ‘형제적 사랑의 실천’은 신앙의 다른 면을, 나와 하느님만이 아니라 나와 이웃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실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드러난다는 가르침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가르침처럼 생각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믿음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 ‘요한의 서간들’ 칼럼에 실린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허규 베네딕토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사제로 수품,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약성서 교수로 요한 묵시록과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허규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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