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27)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
절체절명의 순간, 표징 보여주시는 하느님
-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작 ‘이사야’, 프레스코화, 1729년.
이사야서 1장 1절에서는 이사야가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활동했다고 말합니다. 모두 기원전 8세기 남왕국 유다의 임금들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보다는 아시리아와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기원전 8세기의 문제는 언제나 아시리아입니다. 이사야와 미카의 시대 역시 아시리아의 확장에서부터 출발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그가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 곧 기원전 740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찌야 시대에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말하기 어려워지지요.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기원전 745년에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아시리아의 임금이 된 후 아시리아는 이미 강력한 팽창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탐 시대도 이사야의 활동은 그리 분명치 않습니다. 이사야서에 직접 등장하는 임금은 주로 아하즈와 히즈키야입니다.
좀더 이른 시기였던 아모스와 호세아 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가 시리아를 괴롭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여력이 없으니 이스라엘은 잠시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명백히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더욱 커질 때, 이제는 이스라엘에게도 문 앞의 작은 적 시리아가 문제가 아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손을 잡고서라도 점점 거세게 다가오는 아시리아를 막아야 했습니다. 아니, 둘이 손을 잡아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유다까지 반 아시리아 동맹에 끌어들이려 합니다.
그때 유다의 임금이 바로 아하즈였습니다. 아하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아시리아는 아직 강 건너 불이었기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동맹 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리아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남왕국 유다로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입니다(기원전 736-734년, 이사 7장). 그들은 아하즈를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왕위에 앉히려 합니다. 당황한 아하즈는 고전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오히려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손을 내밀며,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막아 달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벌벌 떨고 있는 아하즈를 꾸짖습니다. 어리석은 정치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뛰어난 외교적 판단력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나라와 손을 잡고 어느 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임금을 설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는 것입니다. 다윗 왕조를 선택하시고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아하즈를 굳게 서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마누엘의 예언이 나오게 됩니다(7,10-17). 하느님은 유다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아하즈에게 손수 표징을 보여 주시는데 그 표징이 곧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의 탄생입니다.
신약 성경의 인용으로 더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서는 70인역의 그리스어 본문을 따라 이 구절을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고 인용하지만 이사야서의 본문은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로 되어 있습니다. 긴 설명은 생략하고, 그 젊은 여인은 아하즈의 아내이고 여인이 낳을 아들은 히즈키야입니다. 아하즈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800년 후에 있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표징이었습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침입으로 다윗 왕조가 위협을 받는 순간에, 아하즈에게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를 보호하고 계심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적용된 것은,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이르러 더 충만하게 실현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 사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아하즈는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시리아의 군사 원조를 청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팔레스티나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던 아시리아는 유다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여, 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합니다. 더 시간이 흐른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 호세아가 아시리아를 거슬러 일어나자,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 5세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기원전 722년).
그럼 남왕국 유다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당분간은 위험을 피했고 멸망도 면했습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강대국에 맡기는 것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강대국에 대한 종속과 의존을 가져옵니다. 유다는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조공을 바치는 한 아시리아는 굳이 유다를 멸망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공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즈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 그리고 이사야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 문제는 다음 주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1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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