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06] 이스라엘 예언자의 소명
우리는 예언자들이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틀린 견해는 아니지만, 그것은 예언자 소명의 일부일 뿐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예언자라고 불린 이는 아브라함이다(창세 20,7). 그러나 그가 앞날을 예견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또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황홀경’에 빠지는 예언이 나온다. 사울도 주님의 영이 내리자, 딴 사람처럼 되어 예언했다고 한다(1사무 10,6.10 등).
그러나 이 예언도 앞날에 대한 예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언자’의 소명은 무엇이고,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궁금해진다.
예언자 소명의 기원
이스라엘의 예언자직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물들을 통해 당신 뜻을 전하겠다는 약속에서 기원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나이 산 아래 있을 때, 주님 말씀을 직접 듣기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대신 듣고 전해달라고 청했기 때문이다(탈출 20,19; 신명 5,24). 그 뒤 이스라엘에는 모세를 잇는 예언자직이 세워지게 되었다(신명 18,18).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예언자이자, 예언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스어 ‘프로페테스’가 예언자의 소명을 잘 드러내주는데, ‘앞에 서서 말을 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이 그리스어가 나중에 영어 ‘prophet(예언자)’으로 발전한다. 탈출 4,16도 예언자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하느님이 되어줄 것이다.” ‘그’는 아론이고, ‘너’는 모세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느님 역할이고, 아론은 모세의 예언자가 된다. 아론은 파라오 앞에 설 때마다, 모세의 말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탈출 7,1 또한 같은 방식으로 예언자를 설명한다.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였다.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은 너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소명은, 앞날의 예견이건 백성을 꾸짖는 훈계건, 하느님을 대신해 말씀을 선포하는 대변자가 되는 것이다(예레 15,19 참조).
그러나 예언자의 소명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야 했으며, 원하지 않음에도 부르심을 받았다. 모세나 예레미야도 예언자의 직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였다(탈출 4,10-15; 예레 1,6). 부족한 자질에 대한 자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혹한 훈계나 심판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모진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온 나라 백성이 그의 말을 거부하며 맞서 싸웠으므로(예레 1,18-19),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예레 26,24; 32,2). 그러나 일단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는,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 그 말씀을 무조건 전해야 한다(아모 3,8).
이렇게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줌으로써, 이스라엘의 현재를 개혁하고 앞날을 형성해 가도록 돕는 중재자가 되어 주었다. 주님께서 늘 인간의 대리인을 통해 말씀하셨기에, 성경의 예언 신탁들은 동일한 하느님의 말씀임에도, 예언자의 성격이나 행동방식에 따라 다양한 기법과 문체로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예언자들의 역할
초기에는 예언자들을 ‘선견자’라 불렀다(1사무 9,9). 곧, 주님의 영으로 비상한 통찰력을 얻기에,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앞날도 예견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선견자에게 갔다. 사울은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려고 사무엘을 찾아갔다가, “이스라엘의 영도자”(1사무 9,16)가 되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예언자 소명의 또 다른 역할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중재자로 서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을 위해 중재 기도를 해준다(1사무 12,19; 예레 37,3 참조).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곧, 그가 하느님과 연결해 주는 중재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예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창세 20,7). 예언자들의 중재 기도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재앙도 막을 수 있었다(모세의 중재로 백성을 구한 탈출 32,11-14 참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1사무 10,1; 16,13), 나탄은 밧세바 사건으로 다윗을 꾸짖었다(2사무 12,1-15). 엘리야는 우상숭배 문제로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후에게 맞섰다(1열왕 18,16-40; 19,1-4). 임금들은 예언자에게 전쟁에 나가야 할지 여부를 묻기도 했다(1열왕 22,5-28). 유다 왕국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는 바빌론 임금의 위협 앞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님의 조언을 구하려 했다(예레 21,1-2).
전기 예언자들
구약의 예언자들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 예언자’들은 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까지 역사서에 섞여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사무엘, 나탄, 엘리야, 엘리사 등이 모두 전기 예언자에 속한다. 전기 예언자들은 주님 영에 사로잡힌 ‘황홀경’ 속에서 예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무엘도 무아경에 빠져 예언했으며(1사무 19,20), 음악으로 황홀경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엘리사는 음악가를 데려오도록 요청했고(2열왕 3,15), 연주가 시작되자 주님의 힘이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어찌보면, 우리가 미사 때 부르는 성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1사무 10,5에도 수금과 비파를 타는 가운데 예언자 무리가 황홀경에 빠져 예언했다. 황홀경은 여염 사람들에게 옮아갈 수 있었으므로, 사울도 황홀경에 빠져 예언한다(1사무 19,20-24 참조). 그래서 ‘주님의 손이 내렸다.’는 표현이나 ‘주님 영이 예언자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은 전기 예언자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1사무 10,5-6; 19,20; 2열왕 3,15 등). 주님의 손이 내린 예언자들은 초인적인 힘도 발휘한다(1열왕 18,46 참조).
전기 예언자들은 신탁에 대한 대가를 받았으므로, 사울은 사분의 일 세켈을 준비해서 사무엘을 찾아갔다(1사무 9,8). 북 왕국의 태조 예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는 왕비가 빵 열 덩어리, 과자 몇 점, 꿀단지를 가지고 예언자 아히야를 방문했다(1열왕 14,1-3).
이방의 예언자들
예언자직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주위 나라에도 비슷하게 있었다. 고대 시리아의 ‘에블라’ 문서에(기원전 23세기) 예언자라는 말이 이미 언급된 것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늦은 편이다.
황홀경 예언도 이스라엘에만 있던 관습이 아니었다. 성경은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에게 일어난 황홀경을 언급한다.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댔다.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1열왕 18,28-29). 고대 시리아의 ‘마리’ 유적지에도 중요한 자료들이 발굴되었는데, ‘무훔’이라는 단어가 ‘무아경 예언자’를 뜻했다.
후기 예언자들
그러다가 이스라엘에서는 기원전 8세기의 아모스부터 예언 신탁들이 문서로 쓰이기 시작한다(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의 신탁이 부피가 커서 앞에 놓였으나, 시대적으로는 아모스가 가장 빠르다). 그래서 ‘후기 예언자’들은 ‘문서 예언자’로도 불리며, 자기 이름을 지닌 예언서가 존재한다. 곧, 아모스부터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등이 모두 후기 예언자에 속한다.
후기 예언자들 사이에는 황홀경 예언이 많이 배제되었지만, 에제키엘처럼(8-11장 등) 일종의 무아경에서 환시를 보는 경우는 있었다. 또 무리지어 생활하던 전기 예언자들과 달리(2열왕 2,3 등), 후기 예언자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종교 · 전례보다 윤리 · 도덕을 더 중시했으며(이사 1,10-17; 아모 5,21-24 등), 예언에 대한 대가도 받지 않았다.
사실, 이스라엘은 지파 중심의 평등사회였다. 그러나 사무엘의 경고처럼(1사무 8,11-18), 왕정과 함께 귀족층이 생겨난 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공정과 정의를 지키라고 율법을 주셨으나, 부유층이 땅을 독식하고 약자들을 끊임없이 착취했기 때문이다(이사 5,8; 아모 2,6 등).
예언자들도, 예언을 밥벌이처럼 생각하는 ‘꾼’들이 많아져 타락하기 시작했다. 곧, 민생을 우선에 두어야 할 예언자들이 단순 이익집단처럼 변질되었다(미카 3,5.11 등). 이런 불공정이 극에 달해 비판의 소리를 높인 이들이 바로 후기 예언자들이다.
그러므로 후기 예언자들의 특징은 사회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점이다. 첫 선발 주자인 아모스는, 자신이 돈 받고 예언하는 직업 예언자가 아님을 강조했다(아모 7,12.14). 그 뒤를 이은 예언자들도 직업 예언자들과 달리,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초심으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찾지도 않는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가 신탁을 전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신약 시대와 그 이후
후기 예언자의 마지막은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다. 고대 율법학자들은, 이들의 죽음과 동시에 성령께서 이스라엘에서 활동을 멈추셨다고도 생각했다(탈무드 요마 9b; 산헤드린 11a).
하지만 신약성경을 보면, 예언자의 활동은 그 이후에도 이어진다(마르 11,32; 루카 2,36 등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께서 예언자의 역할을 채워준다. 이 성령은 고대 예언자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영과 동일한 것이다(이사 61,1; 에제 11,5 등).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영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한 요엘의 신탁(3,1-2)처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으며(사도 2,1-13)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언의 은사였다(1코린 14,1).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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