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여행28: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사 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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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06-27 | 조회수3,319 | 추천수1 | |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28)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사 12,6) 하느님의 선택은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기에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했고 아하즈는 멀리 있는 강대국인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시리아는 시리아를 멸망시켰고, 좀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도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아시리아가 언제까지나 남왕국 유다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아시리아는 언제까지 유다의 우방이 되어줄까요? 그 대답은 국제 관계의 빤한 현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강대국 아시리아가 약소국 유다를 지켜주는 것은 아시리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한에서라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무너진 다음 홀로 남은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하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히즈키야가 임금이 되었습니다. 때로 이사야에게 비난받을 일을 하기도 하지만, 히즈키야는 대체적으로 말하면 괜찮은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시리아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꾀했고, 이와 더불어 종교적으로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사야는 종교적인 면에서는 아시리아의 영향을 벗어나려는 히즈키야의 시도를 지지하지만, 그가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 다른 약소국들과 손을 잡고 특히 이집트의 군사 원조에 의지하려 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정치적 동맹은 아무 소용이 없고 중요한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역설하면서, 아시리아를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주님의 막대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기원전 701년에는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침공합니다. 이사야는 처음부터 아시리아에 맞서려는 히즈키야의 시도를 단죄했으며,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 아시리아의 위협은 컸습니다. 유다 왕국은 이미 대부분 지역이 황폐해졌고, 남은 것은 거의 예루살렘뿐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즈키야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18만 5000명을 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고, 산헤립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집트의 군사 원조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를 믿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셨습니다.
이사야는 왜 늘 군사 원조를 청하려는 임금들의 시도에 반대할까요? 아시리아든 이집트든, 상대가 누구인지가 결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위험에서 구하려는 현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시도들을 모두 가당찮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그가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인간적인 요소들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결정에,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으로 대변됩니다. 6장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뵙고는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서 그 하느님을 뵈었으니 “나는 이제 망했다”고 말합니다(6,5). 속된 세상과 철저히 분리된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초월성, 절대성, 인간이 범접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인간의 역사를 결정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시며, 한 나라가 일어서고 무너지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시리아가 쳐들어온다고 두려워 떨 일도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하지 않겠다고 이리저리 손을 내뻗을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에게는 전쟁을 위한 동맹이 무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절대적인 하느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주 하느님께서 언제나 이스라엘의 편에 계시다고 믿고 안일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선택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러한 선택은 믿음이라는 크고도 어려운 응답을 요구합니다. 홀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 아닌 자기 자신을 믿는 교만, 전쟁에서 군사력에 의지하고 아시리아나 이집트를 믿으려는 임금들의 시도, 정의와 공정을 바라시는데 피 흘림과 울부짖음을 열매 맺는 이스라엘을 하느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죄와 공존할 수 없고, 하느님의 절대성은 죄에 빠진 이스라엘과 타협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 노력 없이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위험한 상황 앞에서 인간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고 원조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평온함을 유지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 평온함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멸망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심판은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인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는 흔히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로 이해되어 학자들 사이에서는 구원을 알리는 예언들은 모두 이사야 자신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설명하는 일부 경향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전체에서 그리고 더 큰 역사의 맥락에서 그가 선포한 심판은 이스라엘의 정화를 위한 과정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눈을 멀게 하는 것 역시(6,9-10) 남은 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가 열리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지나가야 할 한 단계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멸망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십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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