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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로마서 특강: 거저 주시는 의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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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10 조회수4,829 추천수1

[로마서 특강] 거저 주시는 의로움



로마 1,18-3,20의 문맥

1,18-3,20에서 바오로는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진노’(1,18)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깁니다(2,1-1 참조). 바오로 시대의 유다인들은 그들이 받은 특권인 율법(2,12-24 참조), 할례(2,25-29 참조), 하느님의 약속(3,1-8)이 미래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보호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특권도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진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경고하며,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 죄의 길로 향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3,9-20 참조). 사실 바오로는 1,18-3,20에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유다인의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방인에게 자랑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면에서 보면 1,18-3,20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다룬 3,21-31을 준비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1-26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을 설명하고, 3,27-31에서는 앞 단락의 내용을 토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은 율법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거저 주시는 의로움

바오로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1,18)라고 말할 때, 의화 앞에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불순종 안에 가두어져”(로마 11,32) 있고 하느님의 “분노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되도록 불리었는데 인간이 자녀가 되는 선택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자유가 그런 소명을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바오로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범주를 택합니다. 당시에 인간은 유다인과 비유다인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인 반면에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비유다인들은 죄인들로 여긴 것이지요.
 
그러나 바오로가 보기에는 선택된 하느님 백성인 유다인들도 비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도 경건한 유다인도 인간이 보기에는 의롭게 보여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오로는 시편 143,2을 빌려서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로마 3,10). 여기서 바오로가 인간은 죄인이며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 자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높이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오로가 그의 체험을 통해서 발견한 하느님은 당신을 거부하는 인간을 멸시하지 않고 반대로, 인간을 용서하면서, 인간을 진보시키고 그를 당신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으십니다. 인간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이론적인 추론을 통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을 볼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죄들을 밝혀 줍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의로움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1-24).

신앙에 의한 의화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로마 3,21-26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간 편에서의 어떤 자기 의화도 배제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특별히 그들만 의화되는 것도 배제합니다. 의화는 각 사람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그가 속한 문화적 배경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각자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 1-2장에서 하느님이 분노를 보이시는 것 같지만 분노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죄 앞에서 하느님의 분노를 예상하고 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시어 죄인들 사이에 서십니다.

바오로가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말할 때, 바오로는 율법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리스도에 비해서 상대적인 것임을 벗겨냅니다(갈라 2,16 참조).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인간의 양심을 교육하고 하느님의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홀로 율법이 갈망하는 것을 계시하고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율법을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의화는 신앙 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신앙은 자기중심주의 안에 있는 빠져 있는 인간이 거기에서 빠져나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은총을 받기에는 부당한 처지에 있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로 들어가기에는 무능력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 은총과 친교를 선물로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에 따른 의화

의화(디카이오시스, 동사는 디카이오오)는 ‘의로움’(다카이오쉬네)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구약에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올바른 생활 방식’이나 하느님 보시기에 윤리적으로 흠 없는 삶을 뜻합니다. 바오로는 이 개념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용하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중요한 모델로 빌려 옵니다. 바오로는 로마 4,2-3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윤리적 온전함보다 의심하지 않고 하느님의 신비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인 자유로움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순종 때문에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며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신이 한 일의 대가로 신앙을 받거나 돈을 주고 신앙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오로는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궁극적인 선물, 곧 신앙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거저 맺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 편에서 필요한 것은 그 선물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것, 곧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확신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이 선물로 마련해 주시는 미래의 왕국을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비롯한 여러 의식을 신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을 보면서 신앙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바오로의 깊은 통찰이 변질된 것을 간파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선행을 통해 구원을 대가로 받는 것, 마치 물건을 사듯 상자 안에 들어있는 구원을 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신교나 가톨릭은 서로를 풍자적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가톨릭은 선행과 성사와 교회를 강조한 반면, 개신교는 오로지 신앙과 하느님 말씀인 성경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개인의 결단을 강조한다고 믿으며 이분화해서 보았던 것입니다. 다행히 20세기 말 개신교와 가톨릭의 진지한 대화 모임을 통해 몇 가지 오해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마련했습니다. 루터교와 가톨릭교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사항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부분을 넘어 행동하자는 공동선언문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의화, ‘이미’ 그러나 ‘아직’

의화는 내면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의화는 자비나 용서만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의롭게 하는 행위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합당한 존재로 만들어가면서,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우리를 변형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화는 성령의 지속적인 선물입니다(로마 5,1-11). 오로지 살아있는 하느님의 숨만이 우리 존재를 심오하게 변형시킬 수 있다. 한번 자유로워진 사람, 의화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로 살면서 새롭게 쇄신된 삶,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 계획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에페 1,3-6). 그런 사랑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유와 존엄성의 뿌리가 됩니다. 이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성을 통한 지식을 추구하는 이방인 세계나 행위에 집착하는 유다 세계와 비교할 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복음 메시지가 바오로 당시에 ‘기쁜 소식’으로서 주어졌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으로

의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에서 이 기쁜 소식을 깊게 체험했습니다. 바오로의 체험은 체험만으로 남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학적 진리로 확장되었습니다.

만약에 의화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꽃을 피우지 않는다면, 그 의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지만 지금도 의롭게 되어가는 중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으로!

[평신도, 2015년 여름호(VOL.48), 임숙희 레지나(엔아르케 성경삶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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