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그루터기]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마태 5,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제가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씀입니다.
흔히 성경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지요. 저도 있습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구절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싫어하는 구절이 하나쯤 있어야 합니다. 없다면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다고 했습니다(히브 4,12 참조). 찌른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듣기 싫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대대로 임금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 싫어했고, 반대를 받지 않은 예언자가 없는 것도,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제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는 말씀을 싫어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짐스럽게 느껴집니다. 이 구절이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하시면 조금은 맘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성경에서 지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꾸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제 앞에 와서 걸립니다. 매년 새해에는 한 해를 위한 말씀과 기도 친구를 정하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는데, 작년 초에 제가 그 모임에 못 갔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사는 수녀님이 저 대신 제비를 뽑아 주었는데, 글쎄 딱 이 말씀이 걸렸습니다. 뽑기를 할 때마다, ‘정말 하느님은 살아 계시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때도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뽑았는데 이 구절이 걸리다니, 이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저를 다시 찌르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성서에는 이와 유사한 말씀들이 더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시편 33,1). 어떻게 할까요? 성경에 마음에 안 드는 구절들이 있다고 해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과연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고민했습니다. 끈질긴 도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제가 자주 했던 질문이 “증거인가, 걸림돌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공동체 안에서 증거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우리 공동체는 교회 안에서 증거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교회는 세상 안에서 증거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가?
웬만해서는 스스로 착한 행실을 인정하며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요.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랬습니다. 아닌 것 같은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단순히 자신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저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수도 생활이 하늘나라의 표징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구름이 끼었나? 아니, 그저 온통 짙은 구름 속에서만 머물고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늘나라는 너무 멀었습니다. 실패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던 때들도 있었고, 불만도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공동체에 대해서 이런 공동체는 흩어 버려야 한다고 믿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그 공동체가 보여 준 모습이 복음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꽤 많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제가 나이가 들어 세상과 타협한 것일까요? 아니면 애를 써도 되지 않으니 포기하고 기대치를 낮춘 것일까요? 좋게 말하면 제가 전보다 너그러워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여부보다 어디를 목적지로 삼고 있는지가 먼저이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이나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각자 기다란 막대기 하나씩 땅에 꽂아 놓고, 그 방향을 따라 애써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갔느냐가 아니라 막대기의 방향입니다.
길을 찾다 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마구 달려서 오히려 목적지에서 멀어지는 일이 있지요. 백 킬로미터 중 일 킬로미터밖에 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옳게 가고 있으면 그 한 걸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을 향해 서 있는지, 그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이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방향만 올바로 잡으려고 제자리에서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는 말씀이 지금도 부담스러운 것이겠지요. 아직도 그 말씀은 멀게 느껴집니다. 이 불완전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 여덟 가지 가운데서도 가장 역설적인 선언입니다. 다른 행복 선언들은 그래도 어떻게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슬퍼하는 사람들”은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은 분명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삶이 괴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완성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이 상태가 충분히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 이것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바라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행복이 제가 믿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너희의 빛”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에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죽는 날까지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슬퍼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목말라하던 것이 채워지리라고 약속하셨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너희의 빛”이 너무 희미하다 해도, 우리의 행실이 별로 착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를 받고 온갖 불완전함이 사라질 날을 기다립니다.
[땅끝까지 제88호, 2015년 7+8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