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3)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하까 1,8)
먼저 하느님의 집을 지어라, 복을 받으리라
- 지오토 디 본도네 작. 1297-1299년. 인노첸시오 3세의 꿈. 성 프란치스코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
“집을 지어라”(하까 1,8). 이 말씀을 들으면,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달려가 성당 수리를 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활동은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집을 지었던 것은 교회 안에서 그의 사명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하까이 예언서에서 집을 지으라고 하는 말씀 역시, 단순히 성전 건물에 대한 논의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기원전 520년, 하까이 예언자가 활동한 연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집어낼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까이 예언서에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1,1)이라고 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의심할 필요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집을 지으라고 호소하는 하까이 예언자의 메시지는 기원전 520년의 상황에 정확히 맞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 칙령으로 고향에 돌아왔는데, 성전이 지어진 것은 기원전 515년입니다. 성전이 무너졌을 때에는 그렇게들 슬퍼했는데, 막상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거의 20년이 걸린 것입니다. 엄청난 대공사를 하느라고 20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까이 예언자는 이제 하느님의 집을 지으라고 재촉합니다.
먼저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1,1) 내린 말씀에서(1,1-11) 하느님은 예언자 하까이를 통하여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에게 성전을 재건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추수해도 얼마 거두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은 꾸며놓고 살면서 성전 재건은 미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학생 때,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1,4)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끼리, 이거 판잣집 아니냐고 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맨 흙벽돌이 아니라 그 위에 장식으로 덧씌운 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느님은, 단칸방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집은 멋지게 해 놓고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여섯째 달 스무나흗날”(1,15) 즈루빠벨과 예수아, 그리고 백성들은 성전을 짓는 일에 착수합니다(1,12-15). 예언서들을 읽으면서, 백성들이 “예언자의 말을 잘 들었다”(1,12)는 구절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유배는 이스라엘에게 주님께 돌아가는 회심의 계기가 됐습니다.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2,1), 곧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났을 때 다시 하느님은 성전 재건을 독려하시며, 당신께서 그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시고 평화를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2,1-9).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2장 10-19절은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꼭 석 달 후인 “아홉째 달 스무 나흗날”(2,10) 내린 말씀입니다. 하까이는 사제들에게 질문하고, 이전에는 백성 모두와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이 바치는 제물이 이전에는 모두 부정했지만 성전 재건을 시작함으로써 이제 그 모든 부정을 씻고 축복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그들을 새롭게 하는 순간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성전 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같은 시기의 예언자인 하까이와 즈카르야를 비교한다면, 두 예언자 모두 성전 재건과 메시아 희망을 포함한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귀향 후 예언자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 두 가지 주제 가운데 하까이는 성전 재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것이 구원을 위한 조건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홉째 달 스무나흗날부터 주님의 성전에 기초를 놓은 날부터 생각해 보아라. …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리라”(2,18-19). 그는 제3이사야와 같이 정의의 실천을 중시하지도 않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대대로 헛된 경신례를 비판해온 예언자들의 전통을 거스르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성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 대해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것은(1,2)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보다 앞세운다는 것, 경제적인 문제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삶을 위하여 “필요한 한 가지”(루카 10,42)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사실을 잊고 다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까이 예언서를 잘못 이해하면 위험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전 건물을 짓는 데에 착수하면 축복과 풍년이 따르며 모든 일이 잘되리라는 기복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먼저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주님께서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고 하신 것이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 세우라는 뜻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집을 지어라”(1,8)라는 말씀도 만사 제쳐놓고 성전 건물을 짓는 데에 매달리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가 교회를 세운 것은 그의 가난을 통해서였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25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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