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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이스라엘 이야기: 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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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27 조회수5,885 추천수3

[이스라엘 이야기] 라합

여호수아 정탐꾼 도와 예리코 정복에 결정적 역할



멀리서 바라본 예리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광야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가 나온다. 예리코는 해저 250미터에 있으니 바다 아래다. 그래서 예루살렘-예리코 길을 지나노라면 비행기가 하강할 때처럼 귀가 먹먹해진다. 이동 거리는 차로 30분이 채 안 되는데 해발 700미터인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 고도차는 1킬로미터나 나는 탓이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라는 말이 실감 난다. 광야 유랑 뒤 이스라엘은 이곳 예리코를 무너뜨림으로써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을 열었다(여호 6장). 이 정복 스토리에는 꼭 기억해야 할 여인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기생 라합이다(여호 2장). 라합은 히브리어로 ‘넓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 뜻처럼 예리코의 문을 활짝 여는 역할을 했다.

예리코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신석기 시작할 무렵인 기원전 8000년경에 이미 정착촌이 세워져, 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풀 한 포기 없어 보이는 광야에 이런 마을이 있어 뜻밖이지만, 예리코에는 예부터 오아시스가 있었다. 성경에 ‘야자나무 성읍’(신명 34,3)으로 불릴 만큼 물이 풍부하고 먹을거리도 많았다. 겨울에도 따뜻해서, 길손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오아시스가 있으니 여름에도 광야를 통과하는 나그네들이 쉬어 가기 좋았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예리코를 지나가셨다(마태 20,29 21,1 참조).

Wellcome Library에 있는 F.J. 쉴즈의 작품 ‘창에 주홍색 끈을 메다는 라합’.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첫 관문으로 잡은 까닭 또한 이런 장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따뜻하면서 먹을거리가 풍부한 진지를 먼저 마련한 뒤 그다음 정복지를 노리는 전략이다. 여호수아는 예리코를 치기 전 정탐꾼 둘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곧장 기생 라합을 찾아간다(여호 2,1). 예리코에서 쉬어가는 이들이 많으니 길손을 접대하는 주막과 기생들도 많았다. 게다가 주막은 온 동네 소문이 모이는 곳이라 해야 할까? 정탐에 적당한 장소였다. 낌새를 알아챈 예리코 임금이 라합에게서 정탐꾼들의 소재를 파악하려 하지만, 그녀는 알려주지 않는다(여호 2,2-3). 유다 전승에 따르면, 라합은 열 살에 기생이 되었다. 워낙 아름다운 소녀라 귀족 가운데 그녀와 관계 맺지 않은 이가 없었으므로, 예리코 상황을 손바닥 보듯 빤히 알았다고 한다. 정탐꾼들은 자기들을 숨겨준 라합에게 보답하려고, 가족을 집에 모은 뒤 창문에 진홍색 줄을 달아 놓으라고 이른다. 그 뒤 여호수아의 군대는 주님의 명으로 예리코 성을 하루에 한 번씩 돌며 행군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돈 다음, 함성을 지르고 뿔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그 견고한 성벽이 무너져 내리며 예리코가 함락 당한다(여호 6장). 라합은 지침 받은 대로 제 집 창문에 진홍색 줄을 달았는데, 그 줄은 그녀가 정탐꾼들을 빼돌릴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이었다(여호 2,18).

이 사건 뒤 라합은 이스라엘에 받아들여져, 새 신분으로 새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사실 어찌 보면, 그녀는 고향 사람들 대신 외부인을 도와주는 배신을 저지른 셈이다. 하지만 멸시에 익숙한 아웃사이더 중 아웃사이더, 곧 기생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미 고착된 예리코 사회의 시선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막 탈출한 태동기에 있었으므로, 아직은 평등 사회였다. 그녀는 놀라운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하신 하느님에 대해 듣고(여호 2,10), 자기도 기생이라는 멍에에서 탈출해 또 다른 꿈을 펼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유다 전승은 이후 라합이 여호수아와 혼인해 여러 예언자와 사제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이 스토리는 기생도 회심하면 새 삶을 살 수 있으며 높은 명성도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신약성경은 조금 다른 전승을 전하지만, 라합을 높이 평가한 것은 유다교와 비슷하다(히브 11,31 참조). 특히 예수님 족보에 라합이 언급돼 흥미롭다(마태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만약 기생 라합을 의미하는 거라면 다윗과 예수님 모두 그녀의 후손이 된다. 하느님이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고 예외적 인물을 쓰신 대표적 예도 된다. 그러므로 천대받는 기생이 주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상 기준에서 약자인 누구에게라도 희망을 주는 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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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25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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