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11: 사울에서 에스테르까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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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11-23 | 조회수3,919 | 추천수1 | |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11] 사울에서 에스테르까지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판관 시대가 막을 내린 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주님께 죄를 지어 자기보다 나은 이에게 왕위를 내주어야 했다. 필리스티아와 전투를 앞두었을 때 자기 역할이 아님에도 번제를 바치고(1사무 13장 참조), 아말렉과 치른 전투에서도 하느님 명령에 불복해 버림받았다(1사무 15장 참조).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준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그의 운명을 슬퍼한다(1사무 15,35 참조). 사울은 새 임금으로 내정된 다윗을 미워해 마지막까지 쫓아다녔는데, 더 비극적인 것은 피붙이인 요나탄과 미칼마저 다윗과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아비로서 느꼈을 배신감도 상상해본다.
역사적으로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에 비해, 고독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울의 삶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빌론 유배 뒤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에스테르기에 사울의 자취가 다시 한번 수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사울의 몰락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아말렉도 함께 나타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사울의 폐위부터 에스테르를 통해 그가 부활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울과 아말렉
사울이 주님 눈 밖에 나게 된 결정적 사건은 아말렉과의 전투였다. 아말렉은 에사우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다. “에사우의 아들 엘리파즈에게는 팀나라는 소실이 있었는데, 그가 엘리파즈에게 아말렉을 낳아주었다”(창세 36,12).
아말렉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말고 아무도 살려두지 말라는 주님 명령이 있었음에도, 사울은 임금 아각을 사로잡고 가장 좋은 전리품의 일부를 챙겨 신임을 잃었다(1사무 15,9.11 참조). 그 뒤에는 재위 내내 필리스티아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끝내 길보아 산 전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1사무 31장 참조).
사울이 죽자, 한 아말렉 사람이 와서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린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사울이 자기에게 죽여달라고 청했다고 한다(2사무 1,12-16 참조). 그는 자기 말을 증명하려고 사울의 왕관과 팔찌까지 챙겨왔다. 적수인 사울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직접 전하면, 새 임금의 신임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신임을 얻으려고, 자결한 사울을 자기가 죽였노라 거짓 보고를 했을 가능성도 높다.
부정한 필리스티아에게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피하려고,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1사무 31,4-5 참조). 게다가 그 보고자는 사울의 몰락에 결정적 원인이 된 ‘아말렉’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사울이 그 사람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했을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이런 배경을 짐작한 다윗은, 주님께서 기름부으신 이를 죽였다고 스스로 말한 그 아말렉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2사무 1,14-16 참조). 싸우다가 전사한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을 위해서는 애가를 지어 바친다(2사무 1,17-27 참조). 그리고 우리는 다윗과 사울의 갈등이 사무엘기에서모두 끝났다고 생각해 왔다.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등장
에스테르기는 배경이 페르시아 시대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무너뜨린 뒤, 그때부터 고대 근동에는 페르시아 시대가 열렸다.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배도 이때 끝난다.
하지만 모두 고향으로 귀환한 것은 아니고, 그곳에 남은 유다인들도 많았다. 그들 가운데 에스테르기의 중심인물인 에스테르와 그녀의 사촌 모르도카이가 포함된다. 에스테르기는 모르도카이를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기원전 587년 무렵)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으로 소개한다(2,6 참조).
그는 에스테르를 양녀처럼 키우고 있었다(2,7 참조). 에스테르는 본디 ‘하다싸’라 불렸지만, 바빌론 양식에 맞추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바빌론 여신 ‘이쉬타르’가 어원으로 보인다. 모르도카이는 벤야민 지파 사람이었고, 증조부의 이름은 키스였다(2,5 참조).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울 또한 벤야민 지파 출신이었으며, 사울 아버지의 이름이 키스였다(1사무 9,3 참조). 물론 모르도카이가 연대적으로 훨씬 뒤의 인물이기에, 사울 아버지에게 증손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가까운 조상 가운데 사울 족보에 얽힌 이름이 있었음을 암시함으로써, 모르도카이를 통해 사울의 부서진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 같다.
에스테르는 크세르크세스 임금의 비 와스티가 폐위된 뒤 그 자리를 잇는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하만이라는 사람이 페르시아 왕국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에스테르기는 하만을 ‘아각 사람’으로 소개한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아각 사람 함므다타의 아들 하만을 중용하였는데, 그를 들어 올려 자기 곁에 있는 모든 대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혔다”(3,1). 공교롭게도 아각은 사울을 몰락으로 이끈 아말렉 임금의 이름이었다. 곧, 성경은 하만이 아각 사람임을 밝힘으로써, 그가 아말렉의 후손임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임금의 명령으로 모든 신하는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해야 했으나, 모르도카이만 거부한다. “임금의 모든 시종들이 하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하였으니, 임금이 그렇게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고도 절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3,2).
당시 임금이나 지위 높은 신하에게 절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던 예절이다(여호 5,14; 2사무 9,6 참조). 그런데 왜 모르도카이는 하만에게 무릎 꿇기를 완강하게 거부했을까?
그 이유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나, 사울과 아각 사이에 미완성으로 끝난 전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곧, 그 전쟁을 계기로 다윗과 유다 지파에게 자리를 내주고 기울어져야 했던 사울과 벤야민 지파가 옛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말렉족 ‘아각’의 후손 ‘하만’과 벤야민 지파 ‘키스’의 후손 ‘모르도카이’의 대결 구도를 다시 한번 반복함으로써, 사울이 범한 과오를 바로 잡으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수 24,7에서 발라암이 내린 신탁도 완성할 수 있었다(아래 글 참조).
“이스라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민수 24,7)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모압 평야에 도착했을 때, 모압 임금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예언자 발라암을 불러왔다. 위 신탁은 발락이 부탁한 저주를 발라암이 축복으로 바꾸어 내린 것이다. 이 신탁에 언급된 이스라엘 임금은 사울을 가리키는 듯하다.
아각은 아말렉 임금이다. 사울은 아각을 꺾어 그보다 뛰어남을 증명했지만, 그와의 전쟁에서 남긴 오점 때문에 폐위되었다. 그래서 에스테르기는 절반밖에 실현되지 않은 발라암의 신탁이 사울의 후손 모르도카이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모르도카이와 하만의 대결
사울과 아각의 전투가 하만과 모르도카이 사이에서 되풀이된다는 사실은 ‘키스’라는 이름에만 암시되는 것이 아니다. 에스테르기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통해, 그 상호관계를 암시해 주었다.
첫째, 하만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도카이에게 앙심을 품고 유다 민족 전체를 없애려 했으나, 계획에 실패해 완전히 몰락한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하만을 꺾어 승리하고도 전리품에 손을 대려하지 않았다. “곧 함므다타의 아들, 유다인들의 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다. 그러나 재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에스 9,10). 이는 사울이 전리품을 가져가면 안 되는데도, 그것을 취했다가 문제가 생겼던 상황을 고치려는 의도로 보인다.
둘째, 본디 왕후였던 와스티가 왕후 자리를 잃은 까닭도 간접적으로 사울과 연관된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와스티를 폐위시킨 것은 임금에게 복종하지 않은 그녀보다 더 나은 사람, 곧 에스테르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함이었다. “왕비의 자리는 그보다 나은 여인에게 주십시오”(1,19).
이 구절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임금님에게서 찢어 내시어, 임금님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주셨습니다”(1사무 15,28). 사울은 하느님께 불복해, 자기보다 나은 다윗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제는 와스티보다 나은 에스테르가 페르시아 왕후 자리를 이어받음으로써, 벤야민 지파는 마지막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에스테르기에 사울이나 아말렉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키스와 아각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은 그 연관성을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숙적인 아말렉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고(신명 25,17-19 참조), 또 영원히 지워져야 한다고 기록된 것처럼(탈출 17,14 참조), 에스테르기는 아말렉을 영원히 기억하려고도 했고 또 지우려고도 했다.
사울 가문의 회복
다윗이 성경에 사울보다 나은 인물로 그려진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적으로 편애하신 탓도, 다윗이 도덕적으로 더 뛰어났던 까닭도 아닐 것이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다윗이었지만, 오히려 다른 잣대로 보면, 사울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타인의 아내를 탐해 그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력이 있는 다윗에 비해, 사울은 여색에 빠지는 일 없이 아내 하나와 첩 하나만 두었기 때문이다(1사무 14,50; 2사무 21,8 참조). 게다가 사울은 암몬의 기세를 꺾고 왕정 경험이 없던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되어(1사무 11,15 참조), 확고한 구심점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윗이 더 강하여 승자가 되었으므로, 사울은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 안에 갇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울이 주님의 분노를 산 탓에 영원히 버림받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지은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것인가? 사울의 비운은 에스테르와 모르도카이를 통해 회복되지 않았나? 사울이 한 민족의 수장이었기에 일반 백성보다 책임이 클 수는 있지만, 에스테르기를 통해 인간 사울은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로 남았을 것임을 믿는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11월호, 김명숙 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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