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성경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를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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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11-23 | 조회수6,225 | 추천수2 | |
[신약성경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를 중심으로
이번호에서는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기도를 다룬다. 먼저 요한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을 요약하고, 이어서 요한 복음서 17장, 특히 그 마지막 부분인 20-26절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겠다.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
공관복음서들, 그 가운데 특히 루카 복음서는 요한 복음서와 비교해 훨씬 더 자주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에 관하여 언급한다(3,21; 5,16; 6,12; 9,18.28-29; 11,1; 22,41-45; 23,46; 마태 14,23; 19,13; 26,36-44; 27,46; 마르 1,35; 6,46; 14,32-39; 15,34). 하지만 ‘주님의 기도’(정확히 표현하자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제자들의 기도’)를 빼고는 기도의 내용은 드물게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에 관한 언급이 드물게 나오지만(11,41-42; 12,27-28; 17장) 기도의 내용도 함께 나온다. 특히 17장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이다. 참고로 더 말하면,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름’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특히 15장; 1,39 참조)도 ‘기도’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요한 복음 17장까지 포함하여,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철저하게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드리는 기도’이다. 요한 11,41-42에 나오는 라자로의 무덤에서 하시는 기도는 엄밀히 말해 청원기도가 아니라, 감사기도이다. 그리고 요한 12,27-28에 나오는 기도는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니 기도’에 나왔던 것과 유사하지만, 예수님께서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관계(요한 1,18 참조)를 맺고 있는 예수님의 신원(정체성)이야말로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전체의 바탕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17장에만 여섯 번(1.5.11.21.24.25절)이나 나온다.
‘예수님의 기도’의 맥락과 그 중요성
요한 복음서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곧 다가올 수난(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에서 하시는 ‘고별 담화’(13-17장)라는 단원의 끝자리에 놓여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공개적 활동은 12장에서 일단락된다. 13-17장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만 따로 모아 식사를 하실 때 하신 ‘유언’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유언의 핵심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15,12)이다.
이 유언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유언이 지닌 의미를 몸소 행동‘(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가르쳐주시기까지 하셨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고별 담화의 단원’의 시작에 놓여있는 예수님의 이 행동을 통해 제자들에게 요청하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인상 깊게 드러나 있다. 곧, 그 사랑은 바로 ‘서로 섬기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유언으로 남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17장에서 기도로, 특히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로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도의 간절함 : 엄밀히 말해 17장은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점에서, 제자들에 대한 ‘고별 말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이 기도는 제자들이 곁에 있는 상태에서 드린 기도라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제자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아니, 이 기도(특히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수난(죽음)을 눈앞에 두고 바친 것이므로, 제자들에 대한 스승 예수님의 바람이 더욱 간절하게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 복음서 17장의 구성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에 따라 다음 세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5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이고, 6-19절은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9절의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참조). 그리고 20-26절은 제자들을 통하여 당신을 믿게 될 미래의 신앙인들을 위한 기도(20절의 “저는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참조)라고 볼 수 있다.
6-8절을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 보기 어렵다는 학자들도 있다(요한 17장의 기도를 ‘대사제적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루터파 신학자 다비드 퀴트래우스[1530-1600년]에게서 유래한다).
요한 17,20-26의 기도의 핵심 내용 :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제자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신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핵심은 ‘하나됨(일치)’이다. “하나가 되게”(하소서)(라틴어로 “utunumsint”)라는 문장은 17장에 여러 번(11.21.22.23절) 나온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요한 17,20-26의 단락은 17장을 마무리할 뿐 아니라, 수난 직전에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내리시는 13-17장의 단원 전체를 마무리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함을 지니고 있다. 이 단락에는 예수님께서 (미래의 신앙인들을 포함한) 당신의 제자들이 ‘사랑으로 서로 일치’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일치의 기준과 근거 :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일치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도 기준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청원에 나오는 ‘하나됨’에도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성부와 성자의 일치다. 이는 11절과 21-22절의 다음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11절).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21절)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절).
그리고 이 ‘일치’가 사랑의 일치를 의미한다는 점이 기도가 진행되면서 23절과 24절, 26절에서 드러난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23절).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24절).
제자들(신앙인들) 간의 사랑, 거기서 나오는 일치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같은 사랑의 샘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의 물줄기가 하느님 아버지, 성자 예수님, 제자들, 미래의 신앙인들 그리고 세상으로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오스카 쿨만의 「기도」 참조).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절).
26절은,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의 마지막 구절이며 13-17장의 고별 담화 전체의 맺는 글이기도 한데, 의미심장하다. 여기에는 제자들(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사랑의 일치가, 근본적으로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일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신앙인들 사이의 진정한 일치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에 근거를 둘 때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참다운 일치는 인간적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묵상 : 삼위일체적 사랑의 샘에서 솟아난 사랑의 강물도 흘러야 한다
요한 복음서 17장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게 사실이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후에야(7,39; 20,22-23)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는 요한 복음사가의 특성을 고려해 보면, 그리고 복음서를 읽고 있는 후대 교회의 신앙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여기 요한 17,23.24.26에 나오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삼위일체적 사랑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사랑의 일치’가 삼위일체적 사랑에 참여하는 차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참으로 은혜롭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삼위의 사랑의 샘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사랑의 강물에 합류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강물이 우리에게 도달해 멈춰서는 안 된다.
강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는 것처럼, 사랑의 강물도 흘러야 한다. 나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특히 우리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성자, 성부, 성령’의 원천을 두고 있는 우리의 사랑이 흘러들어가야 한다.
* 김영남 다미아노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를 가르치고 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교 신학부와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특히 바오로 서간)을 전공하였다. 최근 「로마서」(성서와 함께, 2014년)를 저술했다.
[경향잡지, 2015년 11월호, 김영남 다미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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