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화와 영성 (12) 라자로의 소생
요한 복음서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예술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어 왔다. 카라바조는 복음서의 이 장면을 포착하여, 병을 앓다가 죽어간 라자로의 시신을 매우 일상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화가는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한다.
■ 요한 복음서의 라자로 이야기
○ 요한 복음서를 크게 둘로 나누면, 전반부(1,19-12,50)는 표징들의 책이고, 후반부(13,1-20,31)는 영광의 책이다. 전반부에는 일곱 표징이 소개되는데 첫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꾸신 이야기(2,1-11), 둘째, 왕궁 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4,43-54), 셋째,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5,1-18), 넷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6,1-15), 다섯째,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6,16-21), 여섯째,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9,1-12)이다. 그리고 일곱째 표징이 바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11,1-54)이다.
○ 본문에 따르면 베타니아는 예수님의 친구들인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살았던 마을이다.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1-2절) 예수님이 베타니아에 가신 것은 라자로가 죽은 후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난 뒤였다.(17절) 마르타는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라고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32-33절)
○ 예수님은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그분이 “돌을 치워라.”(39절)고 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41절) 예수님이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44절)
■ 카라바조의 〈라자로의 소생〉
○ 카라바조의 〈라자로의 소생〉(The Raising of Lazarus)은 1609년경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380×275cm의 크기이며, 현재 이탈리아 메시나(Messina)의 지방 박물관(Museo Regionale)에 소장되어 있다.
○ 화가 카라바조(1571-1610년)는 그의 나이 스무 살 경 로마에서 시작하여 나폴리, 말타, 시칠리아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프란체스코 델 몬테(Francesco del Monte) 추기경의 후원을 받아 활발한 작품 활동하고 큰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1606년 카라바조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로마를 떠나 도주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폴리, 말타를 거쳐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나(Siracusa)에서 메시나로 가서 1608년 겨울을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제노바 출신의 상인 조반니 바티스타 데 라자리(Giovanni Battista de’ Lazzari)의 주문을 받아 파드리 크로치페리(Padri Crociferi) 성당의 제단 뒤에 걸릴 〈라자로의 소생〉을 그리게 되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후기 작품이다. 이러한 사정은 시칠리아의 역사가 프란체스코 수신노(Francesco Susinno)에 의해 기록되었다. 당시 메시나의 사람들은 바탕의 밑그림도 없이 걸작을 그려내는 카라바조의 놀라운 천재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 카라바조는 예수님이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극적인 순간을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표현한다. 어둡고 황량한 벽면이 그림의 뒷배경을 이루는데, 등장인물들은 그림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예수님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동굴 무덤 안으로 들어서신다. 그분은 오른손을 내밀어 라자로를 가리키신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신다. 그분의 어깨 위로 빛이 쏟아진다. 빛은 그림의 왼쪽 동굴 무덤 밖에서 비쳐든다. 그림 왼쪽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희미하게 표현된다. 썩어가던 라자로의 시신에 구원과 생명의 빛이 비춰진다. 전체 그림의 중심은 라자로에게 집중된다. 이 예수님의 동작은 카라바조가 앞서 그린 <성 마태오의 소명>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손길이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듯이, 그분의 손길은 죽은 라자로를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신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동작은 결정적이다. 결국 생명이 죽음을 이길 것이다. 이와 같이 빛과 어둠의 대조는 무엇인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이 라자로와 마리아의 얼굴을 비추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카라바조는 죽음과 생명의 딜레마에 집중한다.
○ 라자로는 수의가 벗겨진 채 알몸을 드러낸다. 카라바조는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썩어가는 시신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라자로는 오른팔을 위로 향하고 왼팔은 아래로 향한다. 예수님의 손짓을 받고 있는 라자로가 양팔을 펼친 자세는 마치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과도 같이 넓게 벌어져 있다. 이러한 라자로의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 죽음을 예시하는 듯 하다. 라자로의 머리맡에는 두 명의 여인, 곧 마리아와 마르타가 있다. 죽은 오빠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대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애절하다. 마치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예수님과 라자로 사이에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묘사된다. 이들은 생명의 예수님과 죽은 라자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의 반응은 상반된다. 어떤 이는 라자로에게로 향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빛이 비추는 방향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다. 예수님이 내뻗은 오른손 쪽으로, 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는데, 그는 바로 화가 자신이라고 한다. 사실 카라바조는 여러 번 자신의 얼굴을 그림 안에 표현하곤 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자신의 모습을 〈라자로의 소생〉 안에 그려 넣음으로써 카라바조는 구원과 생명을 위한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려 했다. 살인의 죄를 짓고 도주 생활을 하며 메시나에까지 오게 된 화가는 자신의 처지를 라자로의 이야기를 통해 형상화한다. 고뇌와 불안으로 죽음을 경험하고 있던 그는 빛의 원천을 찾음으로써 죄의 어둠에서 해방되고자 열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그림 안에서 죽음과 생명, 빛과 어둠의 분명한 대비를 통해 잘 표현된다. 이와 같이 카라바조의 <라자로의 소생>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는 구원과 생명의 빛이 과연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묵상하게 한다. 우리는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사이에서 결단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5년 12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c/caravagg/10/65laza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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