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어린양의 상징적 묘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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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12-23 | 조회수3,837 | 추천수1 | |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어린양’의 상징적 묘사
지난 호에 이어 요한 묵시록의 전형적인 주제인 ‘그리스도 어린양’의 상징적 묘사에 대하여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하느님의 일곱 영’(5,6)에 대한 해석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5,6). ‘하느님의 일곱 영’은 묵시록의 고유하면서도 잦은 표현이다. 이 ‘일곱 영’이라는 표현이 처음 나오는 곳은 1,4이다.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이 구절은 묵시록 전체의 서론으로, ‘은총과 평화’를 기원하는 전례적인 인사를 구성한다.
수수께끼 같은 일곱 영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천사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해석의 근거는 무엇보다 신구약에 나타난 병행적 본문들이다.
신약에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히브리서의 다음 본문들이다. “그는 자기의 천사들을 바람처럼(직역하면 ‘영들로’) 만들고, 자기의 시종들을 타오르는 불처럼 만든다”(1,7).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1,14)
구약에서는 라파엘을 “영광스러운 그분(주님)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는 토빗 12,15이다.
일곱 영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성령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 또한 매우 일찍 제시되었는데,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묵시록에서 ‘천사’라는 용어가 ‘영’과 결합되어 나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들은 히브리서와 토빗기의 병행적 본문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특별히 묵시 1,4-5의 문맥을 그 해석의 근거로 든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동일한 문맥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기원하는데, 그 기원이 세 번의 ‘에게서’라는 말을 통해 지적되고 있다. 첫 번째는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으로, 분명히 성부를 지칭한다. 두 번째는 ‘일곱 영’이고,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일곱 영’을 천사라고 해석한다면 어느 학자의 표현대로 ‘이상한 삼위일체’가 되고 만다. ‘은총’이라는 표현 또한 단순히 ‘호의’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에게서’라는 말은 세 이름이 지닌 동일한 차원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일곱 영’을 성령으로 해석해도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 표현이 묵시록 저자의 독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독창성은 사람들의 궁금증과 긴장을 자아내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대답의 첫 번째 단서는 이사 11,2-3에서 암시된다. 비록 이 문맥에서 ‘일곱 영’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얻게 되는 성령의 여러 효과를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 단서는 묵시록의 저자가 ‘영들’에게 부여하는 두 가지 상징적 요소이다. 먼저 ‘일곱’인데, 이는 묵시록의 상징에서 ‘총체성이나 완전성’을 의미한다. ‘은총과 평화’의 원천인 성령께서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어떠한 총체성이나 완전성을 실현하려고 하신다. 다른 상징적 요소는 ‘어좌 앞에’ 계신 그분의 위치이다. 하느님의 통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신다는 것이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성령의 본질을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그리스도는 ‘일곱 영’을 지니신 분이기에(3,1 참조), 성령은 그리스도께 속하는 분이시며, 인격적 요소처럼 그분께 속한다.
우리는 요한 20,22에서 병행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이 문맥에서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고유하고 전형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소유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다.
묵시록에서도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일곱’)을 지니시지만, 당신을 위해 지니시지 않고 파견하신다(‘파견된’).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계시의 총체성을 지닌 가운데 온 땅과 인류에게 파견되신다. 성령께서는 인간적 현실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에 충만히 응답하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성령이시기 때문에 인간 역사의 모든 면에 개입하셔서 그리스도의 ‘새로움’ 모두를 실현시키려 하신다. 그 새로움은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적 종착점으로 이끄실 것이다.
“어린양이 나오시어”(5,7ㄱ)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어좌 한가운데 계시는데’(5,6 참조) 다시 ‘나오신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까?
현실적 의미의 움직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적 다스리심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신다는 상징적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런 위치를 차지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먼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적대 세력에게 거둔 그분의 승리였다.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3,21). 여기에는 부활도 암시되고 있는데(어린양은 5,6에서 볼 수 있듯이, ‘서계신다’ 곧 부활하셔서 살아계신다.), 요한 복음에서 부활은 성부께로 가시는 것으로 소개된다.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5,7ㄴ)
‘받다’라는 동사는 완료시제로서 과거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동작, 곧 그 효과가 현재에도 계속됨을 암시한다. 어린양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으셨고 이제 오래도록 당신의 소유로 지니고 계신다. 이는 어린양께서 두루마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책임자임을 보여준다.
또한 받는다는 것은 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좌에 앉으신 분’,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의지로써 그리스도 어린양에게 당신의 주도권을 이전하려 하시며, 역사의 모든 책임과 권한을 그에게 주려고 하신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오른손’ 안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의 고유한 능력과 직접 연관된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두루마리는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직접 작성하셨기 때문에 그 계획은 하느님의 초월성에 속하고, 하느님의 능력에 상응하는 존재만이 그것을 올바로 해석하며 실행할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 어린양께서는 하느님과 동등한 초월성의 차원에서 어떤 매개체도 없이 그것을 직접 받으신다. 두루마리로 상징되는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초월적이지만, 그리스도 어린양에 의해 묵시록 전체의 전개 안에서 계시되고 실행될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의 찬양(5,8)
그리스도 어린양께서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어린양께 경배하며 찬양한다. 그들의 구체적 행동은 ‘엎드려’ 경배하면서 수금과 향이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쥐고’) 있는 모습이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이런 동작은 모순적이다. 눈으로 가득 찬 생물들이 엎드리는 모습이나 수금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금 대접을 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또한 비연속적 구조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엎드리다’라는 행동은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리스도 어린양과 경배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어린양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으신 다음 경배를 받으신다. 이는 두루마리를 받으심으로써 그리스도 어린양의 초월성과 권능에 대한 인정을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어린양이야말로 성부와 동등한 차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떼고 읽으실 수 있는 분, 곧 역사의 계시와 실현에서 하느님의 특권을 지니신 분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의 경배는 그에 대한 인정과 승복이다.
‘수금’은 묵시록의 다른 곳(14,2; 15,2)에서도 발견되는데,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정적이고 축제적인 찬양을 표현한다. 이는 특히 전례 안에서 표현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어린양에 대한 발견은 감동적인 기쁨을 가져온다. 5,4에서 두루마리를 보기에 합당한 자를 찾지 못해 울어야 했던 상황이 원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고한 대로(5,5) 이제 기쁨으로 역전되고 있다.
‘금 대접’은 ‘천상 전례’ 안에서 하느님과 직접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 대접 안에는 향이 가득 담겨있는데, 그 향은 태워져서 연기 형태로 하느님께 올라가야 할 것이다(8,3-4 참조).
저자는 그 금 대접들이 성도들의 기도라고 설명한다. ‘성도들’은 세속에서 분리되어 죄의 용서를 받은, 그리고 하느님의 소유와 ‘왕국’의 구성원이 된 이들을 가리킨다. 아직도 땅 위에 있는 ‘성도’들과 접촉하고 있는 원로들은 더 높은 거룩함의 차원에서(‘금 대접’) 그들의 기도를 받아들이고, 또한 그것을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 2015년 한 해 동안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를 이끌어주신 이성근 사바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이성근 사바 신부. 1991년 사제로 수품, 현재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15년 12월호, 이성근 사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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