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자비심을 잃은 인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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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1-23 | 조회수4,559 | 추천수1 | |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자비심을 잃은 인간
올해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의 증거자’가 되려는 특별희년을 지낸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에 따라, ‘구약성경에 나타난 자비’를 주제로 한 해 동안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첫 순서는 인간 세상의 첫 산물인 카인과 아벨이다.
미국의 소설가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존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이라는 책을 썼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형제간 갈등을 그린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에덴의 동쪽’이 책이나 드라마의 제목이 된 까닭은, 형이 동생을 죽인 뒤 쫓겨간 유배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형제자매는 세상에 태어나 맨 먼저 친구가 되는 사이다. 잘못이 있어도 쉽게 용서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서일까? 때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하고 묻는 카인으로 변하기도 한다.
인간은 본디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지만(창세 1,27), 카인은 주님께서 내부에 심어주신 자비심을 잃는 순간 인간이 어떤 패륜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달에는 그가 무자비하게 동생을 해한 범죄가 어떤 결과로 이끌었는지 그 죄와 벌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갈등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농부가 되었다(창세 3,17-19). 맏이 카인은 아버지의 가업을 잇고, 둘째 아벨은 유목이라는 새 분야로 넓혀갔다. 농경과 유목은 고대 근동의 경제를 지탱하는 두 기둥으로서, 서로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게다가 이 둘은 천지창조의 질서와도 잘 어우러진다.
농경은 원조들이 에덴동산에서 보낸 옛 시절을 회고해주고(창세 2,15 참조), 유목은 인간이 짐승을 지배하는 영장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창세 1,26 참조). 다만 대홍수 전까지 인류는 채식을 했기에(창세 1,29 참조), 유목은 고기 대신 우유나 가죽, 털 등을 얻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육식은 대홍수 뒤에야 가능해진다(창세 9,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참조).
그런데 원조들이 먹은 선악과가 효력을 발휘하기라도 하듯, 인류의 역사가 태동하자마자 살인이 일어난다. 그 직접적 이유는 아니지만, 카인과 아벨 사건에는 농부와 목동 사이의 갈등도 숨어있다. 애써 키운 농작물을 보호하려는 농부와, 풀을 뜯겨 가축을 키우는 목동 사이에는 예로부터 알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예레 12,10: “수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밭을 파괴하고 내 몫을 짓밟았다. 그들은 내 탐스러운 몫을 폐허의 광야로 만들었다.” 참조).
그래서 카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농부들은 목동들을 쫓아내고 기름진 땅을 차지한다. 목동들은 광야나 빈 들을 다니며 가축을 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정착생활을 해야 하는 농부에게나, 풀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카인과 아벨
카인의 이름은 ‘얻다’ 또는 ‘획득하다’로 뜻풀이한다. 득남한 하와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창세 4,1)고 환성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해석하면 ‘-를 빚다’ 또는 ‘-를 짓다’라는 뜻이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창세 14,19)에서 ‘지으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코네)와 어근이 같다.
그러므로 카인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빚어진’ 아이임을 뜻한다. 이처럼 하와의 기쁨은 단순히 아들을 얻은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첫 남자 아담을 빚으셨 듯(창세 2,7), 자신도 둘째 남자를 빚는 작업에 동참했음을 기뻐한 것이다.
아벨은 히브리어로 ‘헤벨’이다. 창세 4장에는 그 이름을 뜻풀이해 주는 구절이 없는데, 성경에 자주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헤벨은 ‘허망’ 또는 ‘한숨’이라는 뜻으로, 이름 자체에 바람처럼 지나가는 아벨의 짧고 허무한 삶이 암시되었다. 헤벨은 인생무상이나 덧없음을 표현하는 말로서(시편 144,4: “사람이란 한낱 숨결(헤벨)과도 같은 것” 참조), 코헬렛(1,2 등)에는 “허무”로 번역되었다.
창세 4장은 아벨을 긍정적으로 소개하지만, 그의 인생을 중심에 두지는 않는다. 카인처럼 이름이 뜻풀이되지도 않았다. 아벨이 무엇을 하였다는 행동의 묘사는 있어도 그의 말은 직접 인용된 적이 없다. 곧 허무한 그의 존재감이 거듭 확인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카인은 내치셨을까?
형제가 바친 제물 그리고 갈등
어떤 사람은 카인이 거부당한 이유를 창세 3,17의 탓으로 추정한다“(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곧 원죄로 저주받은 땅을 경작하여 얻어 바친 제물이기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땅이 저주를 받았으니 오히려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 더 긍정적으로 표현된 듯하다. 하지만 성경에는 농경을 경시했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모세오경에서 하느님께 바칠 곡식 제물들을 다수히 규정한다(탈출 29,41; 레위 2,1 등 참조).
수수께끼의 실마리는 두 형제가 바친 제물, 곧 창세 4,3-4에 숨어있는 듯하다(“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얼핏 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제물을 묘사하는 데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아벨은 양의 ‘맏배’와 ‘굳기름’을 바쳤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첫 소출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탈출 13,2 참조). 다만 사람의 맏배는 짐승이나 그에 상당한 금액으로 대속해서 봉헌한다(탈출 13,15 참조). 그리고 굳기름은 하느님께 바치도록 규정된 가장 바람직한 부분이었다(탈출 29,13; 레위 3,3-5 등 참조). 그러니 아벨의 제물에는 좋은 것만 바친다는 어감이 담뿍 묻어난다.
그 반면, 카인은 땅의 소출을 드렸다는 말만 나올 뿐, 아벨에게 붙여진 그 미묘하고도 특별한 표현이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소중한 것을 바쳤다는 느낌이 없다. 마음에서 우러난 제물이 아니었기에, 카인이 거절당한 것이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정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것을 적당히 주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적으로 베푸는 행위는 그만큼 상대가 아끼는 대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카인에게는 하느님이 ‘참으로 소중한 당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인의 패륜
“자기가 미련해 길을 망치고서 도리어 주님께 화를 낸다.”는 잠언 19,3처럼, 카인은 풀이 죽고 분노에 차 얼굴을 떨구자 하느님께서 물어보신다. “네가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리느냐?”(창세 4,6) 이 구절은 흔히 주님께서 카인을 꾸짖으신 것으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위로하신 말씀이다(뉘앙스를 바꾸어 읽어보라).
달리 표현하면 ‘네가 옳게 행동한다면 얼굴을 떨굴 필요가 없으니,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는 자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그러나 이미 질투로 눈이 뒤집힌 카인은 자기 행동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 끝내 동생을 들로 불러내고 만다(창세 4,8). 들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빈 공간을 뜻하는 말이므로, 위험에 빠진다고 해도 구해줄 사람이 없는 곳이다(신명 22,27 참조). 그곳에서 카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카인은 자기들만 있다고 생각해 동생을 죽였지만, 동생의 피가 하늘로 울부짖어 카인의 죄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창세 4,9-10). 곧 창세 4장이 가르치려 한 것은 누구도 무고한 이의 목숨을 앗을 수 없다는 것과, 아무리 은밀하게 저지른 범죄라도 하느님의 눈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님의 타이름에도 반성하지 못하고 차가운 질투에 몸을 맡긴 카인. 그가 유배된 곳은 에덴의 동쪽 ‘놋땅’이었다(창세 4,6). ‘놋’이라는 히브리어는 ‘방랑하다’를 뜻하므로, 카인이 유배지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음을 암시해준다(창세 4,12 참조). 게다가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살아갈 그에게 마음 둘 곳이 제대로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창세 4장이 초점을 둔 인물은 아벨이 아니라 분명히 카인이다. 성경은 그가 성읍을 세웠다는 말로, ‘도시 문명’이 카인에게서 발전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창세 4,17: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그리고 카인의 후손인 ‘야발’과 ‘유발’, ‘투발 카인’이 문명을 대표하는 ‘방목 기술’(20절), ‘음악’(21절), ‘금속 기술’(22절)을 발전시킨다.
카인이라는 이름에는 ‘대장장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며, 고대의 도시문명과도 관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자비심을 잃고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서 도시문명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관점은 창세 3장과 일맥상통한다. 선악과를 먹은 원조들에게 생긴 수치심이 계기가 되어 문명의 상징인 ‘옷’이 생겨났고(7절), 스스로 땅을 일구는 ‘농경기술’도 발전하게 되었다(17-19절).
그러므로 창세 4장에서 카인을 강조한 까닭은, 대홍수 시대까지 인간 문명이 어떻게 타락의 길을 걸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종국에 모든 인간이 주님의 자비를 망각하고 세상을 폭력으로 채울 때까지(창세 6,11: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이다.
그러나 대홍수 뒤에도 악에 끌리는 본성이 변하지 않아서(창세 8,21: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참조), 시편 저자가 이렇게 고백하였나 보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51,7).
에덴의 동쪽
에덴의 동쪽으로, 하느님께서 계신 에덴을 비껴서 유배된 카인. 지금도 우리 문명은 홍수 같은 정보와 기술에 휩쓸려 성공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은 허물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덴의 동쪽에서 마음 둘 곳을 잃고 방황하는 카인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고, 또 그 이유를 나보다 형제를 탓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 했던 카인은, 경쟁에 치여 반목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월호, 김명숙 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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