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손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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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01 | 조회수6,780 | 추천수1 | |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손님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이백여 년 전만 해도 낯선 길손이 문을 두드리면 대접해 주거나 심지어 재워도 주는 인심이었다. 젊은 날 집을 떠난 김삿갓 시인(1807-1863년)이 이 집 저 집에서 얻어먹으며 평생 유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집을 찾아오는 손님이 사라지고, 방문 자체가 특이한 현상이 되었다. 물론 손님을 집 밖에서 만나니 주부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하고, 은근히 살림살이를 비교하게 되는 사심도 막는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자가용까지 선팅을 짙게 해서 자기 생활의 노출을 꺼리는 오늘날 풍조가 조금은 걱정스럽다. 나를 내보이고 또 손님을 기꺼이 집으로 맞이할 수 있는 사회는 그만큼 신뢰와 정이 쌓여있다는 표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창세 18,1-15은, 아브라함이 느닷없이 방문한 길손 셋을 환대하는 장면을 서술한다. 그가 사심 없이 보살핀 이 길손들은 뜻밖에 사라의 수태를 알려주어 오랫동안 불임이던 아브라함 부부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번 호에서는 아브라함이 길손에게 베푼 자비와 상급과 교훈에 대해 살펴보겠다.
헤브론에 정착한 하느님의 벗
아브라함이 길손을 맞이한 곳은 헤브론의 마므레였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뒤 정착한 첫 성읍이자(창세 13,18 참조), 처음으로 땅을 구입한 곳이다(창세 23장). 헤브론의 이름은 ‘연합하다’ 또는 ‘묶다’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헤브론 주위의 네 정착촌이 연합한 데에서 유래한 듯하다. 헤브론의 옛 이름도 ‘넷의 도시’라는 뜻의 ‘키르얏 아르바’였다(창세 23,2; 여호 14,15).
아랍어로 헤브론은 ‘알 할릴’ 곧 ‘자비로우신 분의 친구’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벗’이라 불린 아브라함(이사 41,8; 2역대 20,7)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헤브론이라는 히브리어 지명의 어근도 우의적으로는 ‘친구’ 또는 ‘벗’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니 길손으로 가장한 천사들이 헤브론으로 주님의 벗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하느님의 벗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헤브론에 묻혔다(창세 25,7-11). 사라와 아브라함 말고도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과 레아도 같은 곳에 잠들었으니(창세 49,31; 50,13), 헤브론에는 지금도 아브라함의 가족 대부분이 모여 있는 셈이다.
마므레의 참나무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도 마므레라는 곳에 살았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마므레는 그 지역에 살던 한 집안의 이름을 딴 듯하다. 아브라함은 참나무 아래에 천막을 쳤는데, 최대한 말을 아끼고 중요한 사실만 언급하는 성경은 참나무의 숨은 뜻까지 서술해 주지는 않는다.
참나무는 히브리어 이름이 ‘엘론’이라, 하느님을 뜻하는 ‘엘’이 들어 있어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다. 이처럼 천사들이 참나무 아래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참나무의 신성함은 창세 12,6-7에도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최초로 제단을 봉헌한 곳은 바로 스켐의 성소 ‘모레의 참나무’였다.
“점쟁이 참나무”(판관 9,37)라는 명칭 속에서도 참나무를 바라본 고대인들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믿음이 지나쳐 참나무가 우상숭배 장소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호세 4,13; 이사 1,29; 57,5 등).
길손의 환대
길손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때는 ‘한창 더운 대낮’이었다(창세 18,1-2). 성경은 어떤 사건에 대해 기록하더라도 일어난 시간까지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굳이 ‘더운 대낮’이었음을 표시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중동의 태울 듯한 여름, 대낮에는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꺼린다. 보통 더위가 사그라지는 오후까지 천막 안에서 쉰다. 그러니 외출하지 않고 낮잠 자는 시간에 누군가가 방문했다는 사실부터 범상치 않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귀찮은 내색도 없이, 천막 어귀로 달려가 손님들을 맞고 발 씻을 물을 내놓는다(창세 18,4). 왜 발 씻을 물을 내어주는지 의아할 수 있지만,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발의 피로를 풀게 씻을 물을 주는 것이 큰 환대였다(창세 24,32; 루카 7,44 참조). 주로 샌들을 신고 다녔기에, 헤브론 주위의 광야를 지나다 보면 발이 쉽게 더러워진다.
길손들이 발을 씻자 아브라함은 빵을 가져오겠다며 뛰어 들어갔다가, 이내 풍성한 만찬을 준비해 나온다. 길손들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는 모르나, 먼 길에 시장했을 마음을 헤아린 까닭이다.
빵만 약속하고도 만찬을 마련한 아브라함을 두고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칭송했다. “바로 이것이 의로운 이들의 방식이다. 조금 약속하고도 넘치게 행하고 베푼다.” 이 이야기에는 아브라함의 인품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저, 낮잠 시간에 방문한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이 악인일 확률은 낮다. 게다가 이 손님들이 소돔으로 갔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보여준 행동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브라함은 빵만 약속하고도 엉긴 젖과 최상급 송아지 고기를 함께 내온 반면(창세 18,6-8), 롯은 손님들을 위해 ‘큰 상’을 마련하고도 ‘누룩 안 든 빵’만 대접했기 때문이다(창세 19,3).
사실 유목을 겸하며 반정착 생활을 하던 고대인들에게 길손은 반가운 손님이었다. 멀리서 온 이들이니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는 멀찍멀찍 떨어져 천막을 치고 가축을 먹이던 시절이니, 나그네들이 끼니를 놓치면 다음 인가까지 가야 했다. 어쩌면 이런 환경이 길손을 대접하는 관습을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길손을 환대하는 관습은 신약까지 이어져, 히브 13,2은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를 지나실 때 누군지 모르고 집으로 초대했다가, 빵을 나누던 순간 눈이 뜨여 알아보았다(루카 24,29-31). 곧 누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일지 알 수 없기에, 아무리 작고 하찮게 보이는 이라도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천사
천사는 히브리어로 ‘말아크’라 한다. ‘보내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이기에, 기본적으로 ‘파견된 이’와 ‘전령’을 가리킨다. 그리스어로는 ‘앙겔로스(angelos)’라 하며, 이 단어는 나중에 영어 ‘엔젤(angel)’로 발전한다. 구약시대에는 단순한 심부름꾼도 ‘말아크’라 불렀다(창세 32,4; 판관 9,31 등 참조). 예언자나 사제들이 ‘주님의 말아크’로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하까 1,13; 말라 2,7 참조).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자라고 해도 대개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창세 18,2: “세 사람” 참조), 나중에야 그들이 천사였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창세 19,1 참조). 삼손의 아버지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판관 13,16). 그가 제단의 불길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체를 알게 되었다(판관 13,20-21).
길손들의 보답
아브라함의 환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길손들은 사라에게 아이를 낳으리라 전한다. 이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고도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마음이 헛헛했을 부부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라가 늙은 자기가 어떻게 아기를 낳느냐며 웃었기에 아들의 이름은 ‘이사악’(이쯔학, ‘웃다’)이 되었다(창세 18,12 참조). 하지만 이사악은 이미 하느님께서 점지해 두신 이름이었다(창세 17,19 참조). 그러므로 ‘웃는’ 주인공은, 곧 이 동사의 주체는 사라가 아니라 하느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라의 웃음은 의심을 표시한 반면, 하느님의 웃음은 믿음이 부족한 인간의 한계를 꼬집는 그런 웃음이다(시편 2,4; 37,13 등 참조).
득남한 뒤에는 사라의 의심스러운 웃음도 만족과 환희로 바뀌게 된다(창세 21,6). 아브라함은 길손들 가운데 한 분이 사라가 숨어서 웃는 것을 아시고 꾸짖는 모습(창세 18,13)에서 그들이 천사들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길손 셋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초대 교부시대부터 교회 전통은 길손으로 가장한 이 세 천사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예표로 해석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손님 가운데 둘만 소돔으로 들어가고(창세 19,1), 한 손님은 사라진다. 사라진 한 손님은 소돔에 대해 아브라함과 대화하시는 하느님으로 보인다(창세 18,16-33 참조).
이 신학은 러시아의 수도자이자 화가였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아이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림 왼쪽에 앉아 있는 천사가 ‘성부’이고, 오른쪽 천사는 ‘성령’이며, 가운데 천사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 위쪽으로 보이는 나무는 ‘마므레의 참나무’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벗 아브라함에게 숨기시는 것 없이(17절) 소돔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셨다. 고대하던 아들 소식을 접하고도 기쁨이 과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침묵을 지킨 그가 멸망을 앞둔 소돔을 위해서는 ‘말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16-33절). 여기에 아브라함의 의로운 성품이 또다시 드러난다. 이런 노력을 보아 하느님께서는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재앙을 거두겠다고 약속하셨다. 물론 그 열 명이 없어 끝내 몰락하지만 말이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아브라함이 길손들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았듯이, 천사들은 이마에 ‘나는 천사요.’하고 적고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도 내가 환대하는 사람이, 또는 못 본 척 외면한 사람이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일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작은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이라 하셨다(마태 25,40). 하지만 만리장성을 하루 만에 쌓을 수 없듯, 초라하고 약한 이들에게조차 허투루 대하지 않는 습관은 몸에 배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무의식중에 마음에 담긴 것을 눈으로 표현하고, 입으로 말하며,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날이 하느님의 천사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갑이니 을이니 하는 사회문제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김명숙 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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