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그리스도 안의 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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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01 | 조회수5,740 | 추천수1 | |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그리스도 안의 구원
지난 호에서 바오로 영성의 여정을 ‘십자가’라는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십자가 사건의 열매인 ‘신앙에 따른 의화’라는 주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것은 바오로의 체험이지만 동시에 나와 당신, ‘우리’의 체험입니다.
체험으로 이해하는
대림2주간 월요일 저녁, 퇴근하고 달려온 ‘생명의 교육자’ 모임과 연구소에서 로마서 3장을 주제로 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시작하기 전에 예쁜 대림초에 불을 켜놓으셨지요. 모임을 마친 뒤 저는 나오기 전에 습관적으로 촛불을 껐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났습니다. 이 선생님이 다음날 새벽에 문득 당신이 켜놓은 촛불을 끄지 않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촛불이 어찌되었는지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연락하고 크게 걱정하셨지요.
일주일 뒤 월요일에 이 선생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이해하기 힘든 ‘신앙에 따른 의화’가 무슨 의미인지 일주일간 성찰했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제가 지었는데 제 죄와는 상관없이 레지나 선생님이 촛불을 끄셔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죄가 없어졌어요. 저는 마치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것처럼 두려움과 걱정에서 거저 해방되었지요. 바로 바오로가 했던 ‘신앙에 따른 의화’ 체험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화의 기초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친절한 친구 바오로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빙긋이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가리킬 것입니다. 바오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악하고 불경한 사람들, 죄인들과 그분의 적대자들, 바로 ‘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내가 마음으로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그분에 대한 신앙의 불씨가 당겨지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며, 삶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에 대해 “예!”라고 응답하셨기에, 인간은 그분의 ‘예’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의화’됩니다.
‘의화(義化)’는 히브리어 sedhaqa에서 온 말로 바오로 서간들 안에서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의롭게 하신 행위를 가리킵니다. 의화(디카이오시스, 동사는 디카이오오)는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이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구약에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올바른 생활 방식’이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윤리적으로 온전한 삶을 의미합니다. 바오로는 이 개념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용하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중요한 본보기로 빌려옵니다. 바오로는 로마 4,2-3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창세 15,6 참조)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윤리적 온전함보다 의심하지 않고 하느님의 신비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인 자유로움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의로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가? 바오로는 ‘믿음,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약속에 의지함으로써’라고 강조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모범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입니다(로마 4,17-22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생명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길이라는 개념은, 불임인 아내가 아이를 가질 것임을 믿는다는 것과 같습니다(로마 4,23-25 참조). 믿음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도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아브라함의 참된 가정이 되고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상속자, 참된 할례인 내면의 할례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속한 특권들을 상속받습니다,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가 자유 안에서 의롭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성장시킬 것입니다(로마 8장; 갈라 2-4장 참조).
모두가 죄를 지었다
바오로는 모든 인간이 믿음을 통해서 의화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먼저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라는 주제에서 출발합니다(로마 1-3장 참조). 로마 1,18-23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죄’에 대해 말하는데, 하느님께서 진노하시는 근본적인 죄를 ‘불경(不敬, asebeia)’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불경은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고 감사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자연계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방인들도,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었던 유다인들도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모두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삶을 사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라면 오늘 이 글을 쓰는 저도 바오로 시대 사람들처럼 ‘죄인’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에 스며들어와 마치 종을 부리듯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우상숭배라는 형태를 취합니다. 우상숭배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지요. 다른 신들만이 아니라 내일, 내가 애착하는 사람, 내가 일하는 직장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내’가 삶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도공이며, 우리는 그분의 그릇이요 창조물인데, 오히려 내가 도공이 되어 하느님을 마음대로 창조(?)합니다. 또한 종을 부리듯이 하느님을 마음대로 조종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런 선행, 이런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께서는 내 말을 들어주시고 이러이러한 것을 나에게 주셔야 해.’ 아!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 인간입니까! 바오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거부할 때 결국 구체적인 죄를 짓게 되고, 윤리적인 타락이라는 결과를 낳는다고 합니다.
로마서 1,28-31의 악덕 목록을 큰 소리로 읽어보셔요.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고 모략꾼이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바오로 당대의 이교도 윤리주의자들이 소개하는 악덕 목록이지만 성경에서 ‘불경한 자들’의 삶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을 무수하게 비난했던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 인간의 행위나 예배로 하느님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것! 이런 우상숭배의 결과는 윤리적으로 혼돈스럽고 무질서한 삶을 낳습니다. 죄의 대가는 자신에 대한 무지와 혼돈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입니다.
“저희 성소가 있는 곳은 처음부터 드높은 영광의 옥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2-13). 우상을 숭배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모욕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모욕하고 비천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예레 7,19 참조).
의화와 죄의 용서
이렇게 우상숭배의 감옥, ‘나(Ego)’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은 혼자서는 이 어둠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어둠은 인간을 하느님과 갈라놓습니다.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로마 7,20.24)
사실 의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일부는 바오로가 그것을 자주 이야기하지 않지만 죄의 용서입니다. 바오로는 용서와 의화를 연결합니다.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로마 4,6-8)
바오로는 다윗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행위와는 상관없는 의로움’(로마 4,6)과 동등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용서와 의화를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화가 한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선물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의화와 죄의 용서 사이의 연결은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도 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1,13-14).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어둠의 권세에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이동은 ‘탄생’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발생합니다. 콜로새 신자들이 즐기는 충만함은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이나 전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2,10-15 참조).
인간의 응답
죄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탕감하시는 그런 빚이 아닙니다(로마 3,24-26 참조).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는 적절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로 시편 저자의 기도처럼 부서지고 꺾인 마음입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130,1.3)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게 여기신다는 체험은 하느님 자비의 체험,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아빠 아버지’ 체험입니다(에페 1,3-8 참조).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자비의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 임숙희 레지나 - 아르케성경삶연구소 대표이며, 대전가톨릭대학교 부설 혼인과 가정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글 임숙희, 그림 서소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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