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의 조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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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06 | 조회수6,542 | 추천수2 | |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이사야의 조언?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에 다윗왕국의 정통성은?
물론 남부 유다왕국만 다윗의 대를 잇는 정통성을 주장하고 또 인정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북부왕국이 그냥 이단 왕국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북부왕국에도 엘리야나 아모스와 호세아처럼 큰 예언자들이 맹활약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왕국을 이어 내려오는 정통성은 남부 유다왕국에 있었다고 해도, 북부 이스라엘왕국의 백성들 또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머뭅니다.
이사야는 히즈키야 임금에게 어떻게 조언합니까?
아하즈의 대를 이어 히즈키야가 기원전 716년에 왕위를 계승합니다(참조: 2열왕 18-20). 새 임금 히즈키야 역시 이사야의 조언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서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과 동맹을 맺으려는 임금의 정책에 반대합니다. “불행하여라,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이들! 그들은 병거의 수가 많다고 그것을 믿고 기병대가 막강하다고 그것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는다.”(이사 31,1)
이사야가 히즈키야 임금에게 한 예언은?
기원전 701년에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때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그(아시리아 임금)는 이 도성(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자기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2열왕 19,32-33)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 곧 하느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다음 구절에서 봅니다. “그날 밤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2열왕 19,35-36) 곧이어 산헤립은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당합니다.(2열왕 19,37)
아시리아의 패배인가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아시리아 십만 대군이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물러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캐내기도 힘들지만 단순히 이스라엘이 싸워 승리했다고 단언하기도 힘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아시리아 군대를 쳤다는 뜻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헤로도토스는(기원전 5세기) 들쥐들이 퍼뜨린 흑사병으로 인해 삽시간에 십만 대군이 죽거나 쓰러져버렸다고 전합니다. 아무튼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주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임금 히즈키야가 취하는 정치적 기회주의 노선에 맞서서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주님께 충실하기를 요청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일 뿐 하느님이 아니다. 그들의 군마는 고깃덩어리일 뿐 영이 아니다.”(31,3ㄱ)
오늘 우리 주변의 현실은?
북쪽의 강대국 아시리아에 의존하려 하던 아하즈 임금이나, 남쪽의 강대국 이집트에 의존하려 하던 히즈키야 임금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있는 우리 대한민국도 이스라엘왕국과 유다왕국의 운명, 잇따르는 멸망을 보면서 같은 민족끼리 가능한 힘을 합쳐 가까워지려고, 또 하나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깊이 깨우치게 됩니다.
또 어디에 의지하기보다는 이웃나라들과 협력은 하되 가능한 스스로 일어서려고 끝까지 노력해야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으며 강해진다는 교훈을 이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갈라지면 멸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 11,17ㄴ)
이사야가 가르쳐주는 바는?
이사야는 2700여년이 흘러간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 말씀을 전하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먼저 예언자의 꾸짖음을 봅니다. “회개와 안정으로 너희가 구원을 받고 평온과 신뢰 속에 너희의 힘이 있건만 너희는 싫다고 하면서….”(이사 30,15) 이어서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우선 눈앞에 외적으로 강하게 보이는 강대국 이집트에만 의지하려는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합니다.
“그들은 죄악에 죄악을 더할 뿐이다. 그들은 내 뜻을 물어보지도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파라오의 보호 속에 안전을 찾고 이집트의 그늘 속에 피신하려 한다.”(이사 30,1ㄷ-2) 그 결과는 빤하다고 이사야는 결론까지 내려줍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보호는 너희에게 수치가 되고 이집트의 그늘로 피신함은 치욕이 되리라.”(30,3)
이사야가 우리에게 무엇을 당부할까요?
이사야는 정의와 공정이 물결치는 세상을 이루라고 주문합니다. 그는 하느님 뜻을 이렇게 전합니다. “보라, 임금이 정의로 통치하고 제후들이 공정으로 다스리리라.”(아서 32,1) 그렇게 하면 행복이 찾아오고 복이 솟아오른다고 말합니다. 정의가 물결치는 새나라, 꿈에도 그리던 새나라가 성립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바람 앞에 피신처, 폭우 앞에 대피처 같으며 물기 없는 곳의 시냇물, 메마른 땅의 큰 바위 같으리라. 그러면 보는 자들의 눈은 더 이상 들러붙지 않고 듣는 자들의 귀는 잘 듣게 되리라.”(32,2-3)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나라를 예로 든다면?
스위스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80년대에 독일, 스위스에서 8~9년간 유학생활하면서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배웠습니다. 유럽 강대국들로 빙 둘러 싸여있고, 그 한가운데 끼어있으면서 1~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도 문화민족으로서 어느 나라도 부럽지 않은 ‘작은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스위스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 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부러워하는 나라로 우뚝 서있습니다. 땅 크기는 남한의 반도 안 되며, 그나마 알프스를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가 많은데 ‘중립국의 틀 속에서’ 당당히 버티고 있는 스위스를 보면 배울 점이 꽤 있습니다.
땅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지만 아하즈나 히즈키야처럼 주변 어느 강대국에도 의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우뚝 서려고 어제도 오늘도 있는 힘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위스는?
인구 5만여 명 남짓한 칸톤(州) 그라우뷘덴(Kanton Grauwuenden) 지역에서는 로만어를 씁니다. 그밖에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크게 세 가지 나라말을 국가공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서로 갈라지지 않고 마음과 뜻을 합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위스는 독일어권 일부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갖가지 지방사투리를 쓰는 지역들이 하나 둘 합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불어권에서 또 이탈리아어 권에서도 합세해 들어와서 지금은 25개 주들(Kantonen)이 하나같이 그들 나름의 특성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며 배려해가면서 오늘의 스위스를 이루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3월호, 글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작전동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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