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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이스라엘 이야기: 사라와 하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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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07 조회수7,592 추천수2

[이스라엘 이야기] 사라와 하가르

 

광야에서 부르짖는 여종의 애원 들으시고…

 

 

브에르세바 아래로 펼쳐진 광야 전경.

 

 

이스라엘 브에르 세바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파란 광야’가 나온다. 사라가 여종 하가르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은 뒤 이들 모자가 살았다는 곳이다(창세 21,21 참조). 아브라함은 많은 후손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자식이 없어 종 엘리에제르에게 재산을 상속해야 할 판이었다(창세 15,2). 하느님은 사라의 아들이 대를 잇게 되리라고 거듭 확인해 주셨지만, 사라는 인내하지 못하고 여종의 몸을 빌려 자식을 먼저 보았다. 정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씨받이를 두던 우리나라 옛 풍습처럼.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본부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씨받이가 들어온 반면, 성경에서는 본부인이 자원해 여종을 바쳤다는 차이가 있다.

 

성서 시대 여인들은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불임의 수치를 여종을 통해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성경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요청을 들어 준 것이라고 명기함으로써(창세 16,2), 그가 의도적으로 하가르를 탐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기원전 19세기 고대 근동 문서에는 불임한 아내 대신 창녀가 아이들을 낳아 대를 잇고, 유산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아이를 갖자, 하가르는 이내 사라를 업신여겼다(창세 16,4-5). 수치를 당한 사라는 죄다 아브라함 잘못이라고 비난하는데(창세 16,5), 사라가 여종을 줄 때 소유권도 같이 넘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곧, 이제는 아브라함이 하가르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주인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옛 메소포타미아에서 집성된 법전들 가운데 함무라비 법이 있다. 이 법전도 여종이 아이를 낳은 뒤 불임인 본부인과 동일한 위상을 주장할 경우 해결책을 언급한다. 오만해진 이 여인의 신분을 종으로 도로 낮추라고. 아브라함도 사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소유권을 되돌려 준다. 그러자 하가르는 혹독한 여주인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려 했다(창세 16,6). 그러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자 천사가 도와주었고(창세 16,7), 원기를 회복한 뒤 천사의 명령에 따라 여주인에게 되돌아갔다. 그 후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했다. 히브리어로 ‘이쉬마엘’이라 하는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들으시다’라는 뜻이다. 곧, 하가르가 광야에서 고통 속에 부르짖던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얻은 뒤에도 이스마엘을 동등한 아들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 확인해 주는 정황이 여럿 있는데, 우선 이스마엘의 이름을 지어 준 이가 바로 아브라함 본인이었다(창세 16,15). 그리고 뒤늦게 이사악을 낳은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 하자, 이 일이 아브라함을 몹시 언짢게 했다(창세 21,11).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스마엘이 이사악과 함께 아버지를 가족 무덤에 안장했다(창세 25,9). 이스마엘이 동등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이스마엘이 성장하기 전에 내쫓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창세 21,10). 이스마엘이 이사악의 상속권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면, 사라는 제가 요청해 낳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야에 사는 아랍 베두인들.

 

 

함무라비 법에 따르면, 남편이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 종의 자식은 정실의 자식과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남편이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면, 종과 그의 소생은 자유인으로 풀어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사라가 의도한 것은, 이스마엘이 상속받지 않는 대신 하가르와 함께 자유인으로 풀려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이스마엘은 훗날 활잡이로 성장했으며(창세 21,20), 이슬람 전승은 그가 아랍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한다. 히브리 민족은 이사악에게서 이어지므로, 히브리 민족의 잔존인 유다인은 아랍인과 사촌 관계가 되는 셈이다.

 

사라와 하가르가 좀 더 자애롭고 참을성 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겠지만, 이는 부족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인 듯하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누구보다 위대한 존재지만, 자식에게 집중되는 본성 탓에 모성애가 때로는 매우 이기적인 형태로 발산된다. 하지만 그런 부족함 속에서도 최종의 선을 찾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성조들이 보여주는 신앙의 길이 아니겠는가?

 

*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6일, 김명숙(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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