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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60: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1마카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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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15 조회수6,619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0)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1마카 1,7)


헬레니즘 문화 확장… 종교 박해의 시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동안 지혜문학을 읽느라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멀어졌지요. 지혜문학은 보편적인 주제들을 다루었기에 특정한 시대와 연관되는 일이 적었습니다. 마지막 집회서는 기원전 2세기까지 내려갔지만, 그 시대의 역사는 아직 안 다루었지요. 이제 다시 역사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기원전 538년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는 페르시아 시대였습니다. 그때부터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누구나 ‘대왕’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시대의 배경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마카베오 항쟁의 역사에 대해서는 마카베오기의 본문을 읽으면서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유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등 지금까지 나타났던 모든 나라는 동방에 속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보면 서쪽이지만, 지구가 얼마나 넓은지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나라들이 동방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역사는 모두 동방 안에서 일어난 세력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는 계통이 다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다른 세상’에서 동방으로 쳐들어온 인물이었습니다. 

 

기원전 336년에 마케도니아의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을 시작하여 기원전 333년에는 스무 살에 페르시아를 꺾고, 이집트로 진출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그 밖에도 인도까지 이르는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중요한 것은 그가 정복한 모든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모두 아람어를 말했는데 신약 성경은 왜 그리스어로 썼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시기에 알렉산드로스가 지배한 모든 지역에 그리스어가 공용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신약 성경이 널리 전파될 수 있기도 했지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 역시, 팔레스티나를 떠나 살고 있던 유다인들이 그리스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두 아들까지 살해되고 나자, 315년에는 그의 수하에 있던 네 장군이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여러 차례의 영토 분쟁이 있었지만, 300년쯤 팔레스티나는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통치를 받으면서 비교적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배자들은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정복민들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임금들과 시리아를 다스리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임금들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유다는 여기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은 이미 터진 셈. 더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겨납니다. 기원전 200년쯤 셀레우코스 집안이 팔레스티나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때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외세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시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서양 문물이 처음 들어올 때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유다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전통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다른 이들은 그리스 문화가 유다 문화 및 종교에 큰 위험이 된다고 보아 이를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유다인들의 공동체 자체 내의 의견 차이였던 것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임금이 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재위 기원전 175~164년). 단순히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에서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안티오코스 4세는 모든 유다인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기로 작정을 하고 유다교의 특징적 요소들인 할례, 돼지고기와 다른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것, 율법에 대한 공경 등을 금지시키고, 유다인들에게 그리스 신들에게 제사를 바칠 것을 강요하며 이를 위반하는 이들에게 사형을 내렸습니다(1마카 1장 참조). 종교 박해가 된 것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번제단 위에 이교 신의 제단을 세울 것을 명하기까지 했습니다.

 

대개 이러한 박해는 기원전 167년에 발생하였다고 봅니다. 이때에 유다인들은 두려움 때문에 배교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수동적인 저항을 선택하여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사제였던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인도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적극적으로 대항하였습니다(마카베오 항쟁). 기원전 164년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 제단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마카베오기입니다. 마카베오기 상ㆍ하권은 줄거리가 이어지는 책이 아니라, 서로 별개의 책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시대의 사건들을 두 권에서 각각 서술하기도 하는데, 두 책 사이에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거의 담담하게 사실들만을 소개했지요. 이제 두 주간에 걸쳐 마카베오기 상하권을 읽고 그 둘을 대비해 보면, 한 시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들에 서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책들의 목적은 객관적으로 사실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민족의 역사를 읽어내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13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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