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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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17 | 조회수6,077 | 추천수1 | |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
지난 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인간은 의로운 상태로 된다는 것에 대해 함께 성찰했습니다. 신앙에 따른 의화는 하느님의 자녀 됨이라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되어간다고 보았고 이 여정을 네 단계로 묘사합니다.
체험으로 이해하는
주님 세례 축일(1월 10일) 전날인 토요일에 친구들과 복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오랫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시고 지금도 이주민들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우울증, 애정 결핍증, 자존감 상실 등 마음이 아픈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많은 것이 치유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매우 힘들게 살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이 같은 체험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저에게 이렇게 인사하십니다. “우아! 레지나! 하느님의 딸이 왔구나.”
우리를 부르는 호칭이 여러 가지지만 우리의 자존감을 가장 드높이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호칭은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딸’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고
바오로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자녀 됨의 첫 단계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세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각자가 어떤 동기로 세례를 받았든지 세례가 우리 삶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로마서 6장은 바오로의 ‘세례신학’을 담고 있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6,3-4에서 바오로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것(죽음과 부활)이 우리 것이 되는 여정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오로에게 세례란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것이 이제 내 것이 됩니다!
‘세례 받다’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동사 ‘밥티조’는 ‘물속에 잠기다’라는 뜻인데 세례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줍니다. 물은 삶이나 죽음을 상징하는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 속에 잠기는 것이라는 세례의 실재를 물속에 잠겼다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 표현합니다. 옛 사람으로 잠겼다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일어섭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규정에 따라 치르는 공동체 입문 예식과정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과정입니다.
세례는 그토록 근본적이어서 새로운 관계가 창조되도록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 됨의 두 번째 단계는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재 상태의 삶입니다. 로마 8,14-17에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단락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오로는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자녀”를 “하느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과 동일시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됨이 성령과 함께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오로는 신약성경 저자들 가운데에서 ‘자녀로 삼음(그리스어 휘오테시아)’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개념은 바오로 서간에만 나오는 바오로의 고유한 용어인데 바오로는 이 용어를 선택하여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자녀로 삼았다는 개념으로 확장했습니다(갈라 4,4-7; 로마 8,15-16).
아마도 구약의 배경이 바오로가 전하는 가르침의 기반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다윗과 계약을 맺으시고 아들로 삼으신 이야기에 나오는(2사무 7,14) 다윗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임금은 혈연관계의 아들이나 정당한 상속자가 아니라 상속자들의 계보 안에 합법적으로 입양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시대에 로마제국의 양자법도 바오로가 이 단어를 사용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양자가 된 사람은 새롭게 아버지가 된 사람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유다 세계와 그리스-로마 세계를 잘 알던 바오로는 이 ‘휘오테시아’라는 개념을 통해서 복음의 핵심, 곧 “인간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가정에 속하게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바오로의 성령 체험은 하느님의 자녀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정의하는데 근본적인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바오로에게 성령은 비둘기나 바람 같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하느님 아들의 영입니다. 갈라 2,20에는 바오로의 성령 체험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호칭을 “하느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로 정의함으로써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례로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까지 이 호칭이 확장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자녀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알게 하며, 우리가 예측하지 않았던 친밀한 관계를 아버지와 맺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외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성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영감을 주며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의 삶은 ‘그리스도 안의 삶’을 목표로 합니다.
자유와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하느님의 자녀 됨의 세 번째 상태는 종말론적인 상태입니다(로마 8,19.23). 세례 받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전부가 아니라 나중에 주어질 것의 맏물로서 주어졌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코린 3,18).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고 신앙의 성숙과 자유의 삶을 시작합니다. 자유는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비롯되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6,18.22).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는 억압된 종살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랑에 봉사하는 새로운 종살이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되면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종의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는 부활, ‘성령 안의 삶’,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영역에서 산다는 것은 완전한 자유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온전히 속량될 때 우리는 자유를 충만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고통을 겪으면서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자유, 곧 ‘몸의 속량’은 두 가지 차원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 죽음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 곧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8,2.9.10).
두 번째 죽음은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때의 지상의 몸은 부활한 몸으로 변형되는데 그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반영합니다(1코린 4,7-5,10; 로마 8,11.13.17.23).
아드님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하느님의 자녀 됨의 네 번째 상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된 상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 8,29).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됨은 하느님의 계획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됨은 ‘선택’이라 부르는,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택하심에 달린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자신의 창조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 1,3).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에페 1,12).
하느님의 자녀들의 의로운 삶
우리는 금수저를 가진 집안보다도 더 좋은 가정인 하느님 가정의 아들과 딸입니다. 시편에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1,3)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 곧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께 그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오로가 성찰한 하느님의 자녀 됨의 네 단계의 여정이 우리의 삶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작된 이 하느님 자녀 됨의 여정을 성령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완성해 갈 것입니다.
“오! 아버지시여. 당신은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당신 피조물을 굽어보시고 감싸주시며 그에게서 오직 당신의 온갖 기쁨을 두신 저 사랑스러운 당신 아들만을 보십니다”(삼위일체의 엘리사벳 복녀의 ‘삼위일체께 바치는 찬미가’ 중에서).
* 임숙희 레지나 - 아르케성경삶연구소 대표이며, 대전가톨릭대학교 부설 혼인과 가정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글 임숙희, 그림 서소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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