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지도자들: 비정한 아버지 아브라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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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17 | 조회수9,519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지도자들] 비정한 아버지 아브라함(Abraham)
아브라함은 노아와 셈의 자손이지만 조상들과 달리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히브리 전승에서 첫 번째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본다. 또한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존재는 기원전 2000년 아시리아의 유적과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도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이동한 경로인 스켐과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과 네겝, 요르단의 들판, 헤브론, 브에르 세바, 그라르 등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던 사해와 큰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지금도 갈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일생은 많은 부분에 신화적 색채를 띠고 있다. 현대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바로 그의 장수 비밀과 고령의 아내 사이에서 아이를 낳게 된 사실 등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믿기 전에 살렘의 왕 멜키체덱의 신 엘 엘리온(El Elyon : 가장 높으신 하느님)에게 복종을 서약한 것과 아들 이사악을 번제의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을 볼 때 역사시대가 아닌 신화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큰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무수한 전쟁과 재난을 겪는다는 일종의 암시처럼 보인다.
약점투성이인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일생은 신화적이지만 현대인들의 마음에 와 닿는 인간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테라의 세 번째 아들로서 형이 일찍 죽자 그 조카인 롯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다. 한동안 롯과 살다가 롯을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떠나보낸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시자, 조카인 롯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의로운 이들 열 명만 있어도 살려달라고 청한다. 롯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일종의 대부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막내로 태어났음에도 큰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가부장적 지도자인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에게는 인간적인 약점도 있었다. 자기의 부인인 사라의 외모가 뛰어나 이집트의 파라오가 탐을 내자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말하고 뒤로 슬쩍 빠져 파라오가 사라를 한동안 부인으로 삼게 했다. 이 때문에 이집트에 여러 재앙이 닥쳤는데, 파라오가 이를 알고 아브라함에게 사과를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잘못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지 않았는가?
아들을 낳으려고 여종을 취한 것 또한 존경스럽지 않다. 여종 하가르와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얻었는데, 사라에게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고 아들과 첩을 사막으로 내쫓은 것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정말 비인간적이다.
역병으로 남자들이 죽어가는 한계 상황의 공간인 사막에서 대를 이으려고 또 다른 여자를 취하는 것까지는 가문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합목적적일 수 있다고 쳐도 말이다.
자기 여자와 아이를 지키는 데도 어찌 보면 비겁하고 무책임하지만,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요즘으로 보면 엄청난 살인마이고 가정폭력의 가해자로 볼 수 있다.
정말로 주님께서 아들을 희생제물로 요구했다면, 차라리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부모다운 모습이 아닐까? 자식을 먼저 보내느니 대신 세상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가르와 이스마엘이 사막으로 내쳐질 때 보고만 있었듯이 이사악을 제물로 삼을 때도 차라리 아들 대신 불 위에 올라가겠다고 주님께 요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부족하고 이기적이며 비겁한 우리 인류의 조상에 걸맞은 것이 아닐까도 싶다.
아이들이 보는 위인전의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멋지고 완벽한 슈퍼맨이지만, 실제 세계에서 만나는 지도자들은 얼마나 흠집과 허점이 많은가? 도덕적으로나 능력으로나 지도자는 절대 어떤 실수나 실패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일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도 버려야
아브라함이 아들을 불태워 희생제물로 삼는 장면은 단순히 가족 내 사건은 아니다.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로 유명한 제나라 시대에 역아라는 한 관리는 자신의 아이를 삶아 주군에게 바쳤다. 하지만 역아의 의도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자식을 희생한 아브라함의 선택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브라함은 출세하려고 죄 없는 자기 아이를 바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을 희생한 비슷한 이야기는 더 있다. 에밀레종을 만들려고 아이를 바쳤는데, 나중에 보니 아이가 아니라 산삼이더라 하는 설화도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세속적인 어떤 목적 때문에 아들을 바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라면 가장 소중한 것도 버리고 희생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언명령에 답한 것이다.
아들 이사악에 대한 사랑이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의 본능적 사랑이라면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더 나아가 인류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하려는 내용은 신약시대의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다하려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사건과도 연결할 수 있다.
물론 아브라함이 아들을 희생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희생제물로 삼으신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항소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아브라함이 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조카와 그 일가를 끝까지 보호하고 책임지려 했던 태도와, 아내를 지키려고 파라오라는 어마어마한 권력 앞에 초라하게 스스로의 모습을 숨겨야 했던 굴욕적인 상황, 바랐던 자식인 이스마엘을 첩이자 종인 하가르를 통해 얻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상황, 또 다른 아들이자 적장자인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포기하려 했던 극한적인 선택은 현대의 지도자에게도 되풀이해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보면 거의 가족들이 그 원인이 되는 때가 많다. 아내와 자녀를 위해 뇌물이나 특혜를 받았다고 변명하거나 부모 형제인데 어쩌겠냐면서 슬쩍 부패를 덮으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본다. 이럴 때, 아브라함이 자식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깊이 묵상해 보면 어떨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항소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가문은 동생들과 자식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대의를 위해 선택한 의거를 장엄하게 마무리하라는 주문이다. 어쩌면 안 의사의 어머니가 이 시대 어떤 지도자보다 아브라함의 모습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안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피눈물 나는 편지를 쓰며 이렇게 당부하였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절대로 불효라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먼저 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라.”
아브라함 역시 조카 롯과 아들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운명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아브라함을 일으킨 존재가 주님이시고,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바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아브라함과 같이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이나 가족, 친구나 고향사람을 기꺼이 희생할만한 진짜 큰 지도자는 누구인가? 또 나는 얼마나 이기심을 버리려 하고, 완덕을 향해 무엇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가?
* 이나미 리드비나 - 심리분석 연구원. 한국 융 연구원 지도 분석가이며 서울대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서를 심리적으로 풀어본 슬픔이 멈추는 시간」,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등의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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