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이스라엘 이야기: 베타니아 라자로 무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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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3-28 | 조회수8,057 | 추천수1 | |
[이스라엘 이야기] 베타니아 라자로 무덤 수의에 싸여 걸어 나온 라자로… 그의 무덤에서 부활 희망 새겨
- 라자로 무덤 입구.
베타니아는 성경에 두 군데로 나온다. 하나는 라자로 남매가 살던 곳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요르단 강(요한 1,28)이다. 이 글의 주제는 전자로서, 올리브 산 동편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요한 11,1-44).
베타니아 이름 뜻은 두 가지로 추정한다. 하나는 ‘벳-아니아’ 곧 ‘가난의 동네’다. 두 번째는 ‘벳-테에님’, ‘무화과의 동네’로 풀이한다. 베타니아에 나병 환자 시몬이 살았고(마르 14,3) 라자로도 앓다가 죽었음을 생각하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많은 동네였던 듯하다. 과월절 엿새 전 예수님이 라자로 남매 집에 오셨을 때, 마리아가 옥합 향유로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었다(요한 12,1-8 등). 이때 예수님은 당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마리아가 영원히 기억되리라 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비싼 향유를 발에 붓는 건 낭비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낫다는 반응을 보였기에, 베타니아에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는 암시를 풍긴다. 무화과의 동네라는 뜻에도 걸맞게,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신 곳도 베타니아였다(마르 11,12-14).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전후로 라자로 집에 자주 머무신 걸 보면, 이들 남매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다. 마리아·마르타가 오빠를 소개할 때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요한 11,3)라고 했다. 예수님도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베타니아까지 가셔서 그를 살려내셨다. 다만 곧장 가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 더 머무신 건(요한 11,6-11), 라자로를 통해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라자로가 묻힌 곳에 오시자 눈물을 흘리신다. 왜 눈물을 흘리셨는지 의아함을 자아내지만, 마리아·마르타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까지 전달받지 않는가. 오라비의 죽음을 아파하는 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 건 아니었을지. 그 뒤 예수님이 부르시자, 라자로는 수의에 싸인 채 걸어 나와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예부터 관을 쓰지 않았다. 시신은 돌침대에 누이고, 무덤 입구는 평평하고 둥근 돌로 가렸다. 관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입구를 열자 라자로가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라자로는 히브리어로 ‘엘아자르’라 하는데, 하느님이 도우셨다는 뜻이다. 곧, 이름 뜻처럼 주님의 도움으로 두 번째 생을 선사받게 되었다. 이 기적은 요한복음이 기록한 일곱 표징 가운데 마지막이자 절정을 이룬다. 첫 표징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2,1-12)이고, 두 번째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사건(4,43-54)이다. 그다음은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 앓던 병자를 고치신 기적(5,1-18), 네 번째는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신 기적(6,1-15)이다. 다섯 번째는 물 위를 걸으신 사건(6,16-21), 여섯 번째는 날 때부터 소경이던 사람을 고치신 일(9,1-12)이다.
- 베타니아 마을 라자로 남매 집터에 세워진 성당 전면.
라자로의 소생은 일곱 표징에서 절정에 해당하지만, 부활과 구분할 필요는 있다. 두 번째 생을 얻었어도, 언젠가 다시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죽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평화로우리라는 확신을 얻었을 것 같다. 라자로 집에서 50m가량 떨어진 무덤에 들어가 앉으면, 칠흑 같은 어둠이 주위를 휘감는다. 안식 같은 편안함과 더불어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어둠이다. 라자로를 덮친 죽음이 다가오는 듯한, 훗날 무덤에 누운 나를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
바로 이것이 죽음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임을 묵상하게 한다. 사실 행복이 상대적이듯 죽음을 대하는 마음도 각자 다르다. 미련 없이 편안하게 맞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재물·명예를 포기 못 해 발버둥 치는 죽음도 있다. 라자로처럼 요절하는 죽음도 있다. 미래를 알 수 없어 죽음은 두려운 존재지만, 우리는 신앙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려 노력한다.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공포도 잊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손님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운명에 순종하는 성숙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당신을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는 말씀(요한, 11,25-26)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라자로 무덤에서, 삶·죽음·부활을 경험하게 될 나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어느 때 죽음이 닥쳐도,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 그리고 두 번째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평화로우리라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건네고 싶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7일, 김명숙(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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