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지도자들: 용서하고 품는 지도자 아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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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4-21 | 조회수6,765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지도자들] 용서하고 품는 지도자 아담
아담의 자손은 살인자를 비롯해 목자도 있고, 악사와 대장장이 등 갖가지 직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다. 이것을 살펴보면 현대사회에서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과 연결시킬 수 있다. 곧, 카인 같은 열등한 죄인도 다시 품으면서, 카인의 자손이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가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 지도자의 과제다.
앞날을 준비하는 지도자
대부분의 지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만 밀어주고 끌어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무시하고 억압한다. 그러나 지도자 자신도 완벽하지 않아, 그들이 선택한 주변 인물은 ‘십상시’ 같은 아부의 천재들이나, 시키는 일만 하는 무능한 존재들로 채워진다.
힘있는 자의 처지에서 보면, 자신의 말에 토를 달고, 자신의 위상에 위협을 가하는 이들이 마땅치 않겠지만, 조직 전체를 보면 매우 해로운 선택일 수 있다.
영원한 지도자는 없다. 때가 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데, 후계자는 대부분 권력자의 눈치만 보다가 오히려 조직 전체가 후퇴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이나 정권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담은 카인이라는 죄인을 용서하고 품에 안아서 앞날을 내다보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책임감 있는 지도자
아담과 하와의 관계 또한 지난날의 가부장제적 해석과는 다르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 26-27절을 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주 하느님께서 먼저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봉건적으로 해석해 아담에게 하와는 하나의 부속물과 같은 존재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아담과 하와의 관계 또한 수평적이고 동등한 쪽으로 해석한다.
같은 시간에 창조되었건, 자신의 몸을 재료로 만들었건, 아담은 하와가 시키는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말았다. 또한 하와와 그 자식을 부양하면서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으니 과연 어느 쪽이 요즘 식으로 갑이고 을인지 잘 모르겠다. ‘N포 세대’의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먼지로 변할 때까지 고생만 해야하는 아담의 처지가 오히려 을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마에 땀 흘리는 그 자체가 세상에 사는 이유와 방법, 그 자체인데 이를 노예적 상황으로만 이해한다면 인생 자체가 매우 외롭고 힘들 것 같다. 언뜻 보면 가족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힘든 일을 하느라 아프고 지칠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일에 대한 책임감 없이 자기 혼자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지루하며 자기 파괴적인지는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을 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는 설정은, 벌거벗은 인간이 녹록지 않은 지구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존경받는 지도자는
아담이 과연 지도자로서의 긍정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을 위해 인간의 죄와 벌을 다루는 창세기 3장을 읽어보자.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만 먹으면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선 악을 구별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장면이다. 이 시대 어느 누가 이러한 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도자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따를지 말지에 대한 가장 큰 기준은 고비마다 중요한 판단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 지이다. 조그만 것에 집착해서 사사건건 지시하는 지도자보다는, 큰 그림을 그려주고 구성원이 책임감과 주권의식을 갖고 살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담이 가진 첫째 지혜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나 또는 어떤 것을 많이 모으는 구체적인 능력이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해 내는 판단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좀 더 신중히
아담은 어느 의미에서 중세 철학자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1079-1142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아벨라르두스는 일방적인 권위가 가진 모순과 의심, 그리고 탐구가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카딸인 엘로이즈와의 사랑 때문에 신학자로서 많은 것을 잃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선악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의 아담과 유사해 보인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유할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그의 도발적 신학은 ‘새로움’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던 당시의 보수적 신학자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여러 번 파문당할 뻔했다.
어쩌면 아담 또한 지혜에 대한 호기심을 감출 수 없어서 결국 원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을까? 자유의지, 모르고 행한 죄,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능과 쾌락 추구 행위가 과연 윤리적으로 단죄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다만 자기도 모르게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있었던 아담에게서, 역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잘잘못을 저지르는 지도자들의 원형을 본다.
단순하게 기록된 아담의 이야기에 많은 논쟁거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지도자적 자질에 대해서도 우리가 고민해 볼 부분이 많아 보인다. 특히 아담은 무의식 상태에서 아주 위험한 일을 한 인물이다.
많은 지도자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명징하게 깨어있기보다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일단 일을 저질러버리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사실 외에는 별로 존경할 것도 없는 지도자가 더 많다.
모두 영원하지 않다
아담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화과 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고 숨는다. 그때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담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답한다.
또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여자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핑계를 대기도 한다. 이런 비겁함과 누추함은 이 시대 많은 지도자의 민낯과 겹쳐진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가죽옷을 입혀주었다는 설정이 어쩌면 이런 비루함에 그나마 위안이 될까? 지위나 권력 같은 외피, 곧 가면이나 겉모습은 하느님과 세상이 만들어주는 것이지, 결코 잘나서 혼자 이룩한 게 아니다.
우리는 어떤 지위나 소유권도 갖고 있지 않다. 내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니 결국 남는 것은 허무와 분노일 뿐이다.
아담은 ‘땅(adama)’의 ‘먼지(apar)’에서 나왔기에 ‘땅(adama)’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운명이었고, 우리 모두 그렇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어떤 집단도 결국에는 먼지로 변한다. 문명도, 국가도, 학문의 전당도, 부의 제국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지도자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아담의 가르침이다.
* 이나미 리드비나 - 심리분석 연구원. 한국 융 연구원 지도 분석가이며 서울대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서를 심리적으로 풀어본 슬픔이 멈추는 시간」,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등의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6년 4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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