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의 에덴동산 설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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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남충희 | 작성일2016-04-30 | 조회수8,643 | 추천수1 | |
[앞서 게시하였던 글 #3382 '창세기의 창조설화'의 연결편입니다. 창조설화의 주제가 영적 자아의 탄생이라면 에덴동산 설화의 주제는 사람의 회개입니다. 언뜻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회개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영적 자아가 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간(chronos)의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회개가 먼저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나중이지만, 발생(genesis)의 측면에서 보면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이고 사람의 회개가 나중입니다. 창세기(Genesis)는 하느님께서 영적 자아를 낳으시는 영적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영적 자아는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므로 영적 자아의 탄생은 곧 새로운 세상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세기는 우주론적, 물리학적, 생물학적, 사회학적 사건에 대한 역사기록이 아닙니다.] 첫째 장면 (창세기 2:4-9) 주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실 때, 땅에는 아무 식물도 없었으며 어떤 씨도 싹을 틔우지 않았다. 그분께서 아직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밭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거죽에서 물이 솟아올라 대지를 적셨다. 주 하느님께서 대지로부터 흙을 조금 집어 그것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주 하느님께서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고 거기에 그분께서 빚으신 사람을 살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셨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을 주는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려면 반드시 사람, 그 중에서도 그분의 아들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는 목적은 그분의 아들들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일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주만물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땅’은 육신을 지닌 사람이요, ‘식물’은 생명력이요, ‘씨’는 영적 깨달음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인생에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아무런 의미 있는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비’는 영적 갈망을 채워주는 하느님의 사랑이요, ‘밭’은 영적 인간을 경작하고 추수할 이 세상이다. 마른 ‘땅거죽’은 하느님을 애타게 열망하는 회개의 정신이며 ‘솟아오른 물’은 자아의 내면에서 샘솟는 망덕이다. 망덕은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의지이지만 그 원천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이다.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때 땅(earth)은 대지(ground)가 되고 사람은 대지를 밭(land)으로 일군다. 즉, 사람(땅)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서(대지) 자신의 생명(밭)을 가꾼다. ‘흙 한 줌’은 회개의 사건과 함께 하느님 앞에 나선 자아이며, ‘숨’은 성령이다. 사람은 부모의 몸으로부터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 부모들도 모두 흙으로 돌아가므로 결국 모든 사람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의 숨인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순간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한다. 이제 그는 사람답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자신이 죽어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이 새로운 탄생과 깨달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영적 인간)이 나타난 다음에야 이 세상은 비로소 에덴으로 변화한다. 에덴은 ‘비옥한 동산’이란 뜻이다. 에덴에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나무’는 영적 인간의 왕성한 생명력이요 ‘열매’는 영적 생명이다. ‘동산 한가운데’는 자아의 깊은 내면을 가리킨다. ‘생명을 주는 나무’는 성령의 힘으로 영적 생명을 낳는 영적 자아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욕망을 추종하면서 죽음을 낳는 육적 자아이다. 사람은 동산 한가운데에서 어떤 열매를 따 먹는가에 따라 생명을 낳기도 하고 죽음을 낳기도 한다. 풀어 말하면, 사람에게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선택이 놓여있다. 성령의 지혜를 따라 신적인 행복을 누리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지혜를 따라 욕망을 추구하다가 죽을 것인가? 사람의 지혜는 나름대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의지의 갈등을 겪는 것이다. 회개란 사람의 지혜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는 결단의 행위이다. 회개는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혜이다.
둘째 장면 (2:10-17) 개울 하나가 에덴으로 흘러들어 동산을 적셨는데, 그것은 에덴을 지나 네 줄기의 강들로 갈라졌다. 첫째 강은 비손인데, 그것은 하윌라 지역을 돌아 흘렀다.(그곳에서는 순금과 희귀한 향료와 보석들이 난다.) 둘째 강은 기혼인데, 그것은 에티오피아 지역을 돌아 흘렀다. 셋째 강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그분께 사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말고는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에서든 열매를 따 먹어라.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 네가 만일 그것을 먹는다면 그날 죽을 것이다.” ‘개울’은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성령을 상징한다. 네 줄기의 강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힘이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미치고 있음을 상징한다. 4는 동서남북, 생명-죽음-기쁨-슬픔, 미추선악, 희로애락 등을 지시하면서 이 세상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일을 사람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네 줄기의 강’은 하느님의 아들이 출현할 것을 예고한다. 이 세상에 출현한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이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미친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 세상을 ‘경작하여’ 풍성한 영적 생명을 수확하며, 죽음과 거짓(위선)의 유혹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지킨다.’ 하느님의 아들은 항상 생명나무 열매(성령)를 따먹는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사람의 지혜)를 따먹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선과 악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각에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아름답다(美)고 하고,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추하다(醜)고 한다. 몸은 아름다운 것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욕정(欲情, desire)이라고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음은 몸의 단순한 요구인 욕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나름대로 판단과 추리(推理)의 과정을 거친 후에 욕정을 통제하는 추상적 가치를 도출한 다음,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선(善)이라 하고, 그에 위배되는 가치를 악(惡)이라고 한다. 이때 마음이 선으로 기우는 경향을 욕망(慾望, want)이라고 한다. 사람이 선을 추구한다고 할 때에도, 그 선의 근거를 소급하여 올라가면 결국 변덕스럽게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욕정이 나타난다. 그는 욕정에 거슬리는 것을 배제하면서 일방적으로 치우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완전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욕구(欲求 want)를 추종한다는 의미이다. 동서고금 걸쳐서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경험과 이성의 힘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도덕률 또는 윤리체계를 세운다. 그들 중에서 권력자 또는 대중의 지지를 크게 받는 사람은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체계는 예외 없이 감각적 편견이 제공하는 허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지혜는 영적인 죽음을 부른다. 생명나무 열매(영적 생명)는 아무 노력도 필요 없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람은 그저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열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선악과(영적 죽음)를 따먹으려면 남다른 능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감각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선의 유혹에 이끌려 선악과를 따먹는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지혜로 현실을 수용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무르라고 명령하신다. 사람이 자신의 지혜로 만들어낸 편협한 가치로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셋째 장면 (창세기 2:18-25)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 그를 돕기에 알맞은 동료를 만들어 주어야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대지로부터 흙을 집어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빚으셨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무어라고 부르는지 보셨다. 그런 방법으로 그것들 모두는 이름을 얻었다. 이렇게 사람은 온갖 새들과 집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그를 돕기에 알맞은 협력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그가 자는 동안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시고 그 자리를 메우셨다. 그분께서 그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그러자 사람이 말하였다. “드디어 내 동족이 생겼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그녀는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이름을 지어야지.” 그런 이유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고 그들은 한 몸이 된다. 사람과 여자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집짐승’은 욕정, ‘새들’은 욕망을 상징한다. 집짐승과 새들을 ‘부르는’ 행위는 이성의 힘으로 욕정과 욕망을 추상적 개념으로 변환시키는 활동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이성의 힘으로 기술, 학문, 윤리의 체계를 세우고 문명을 건설하며 세상을 정복한다. 그러나 이성은 생사에 관한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논리적 자가당착을 피할 수 없다. 이성은 사람들의 투쟁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도둑질, 질투, 미움, 불화, 살인, 전쟁 등이 끊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은 사람의 진정한 협력자가 될 수 없다. 그 협력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셔야만 한다. ‘잠’은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그분께 자신을 맡겨드리는 행위, 곧 망덕을 가리킨다. 망덕은 하느님의 사랑을 부른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품성을 새로이 심어주신다. ‘갈빗대’는 심장을 보호하는 뼈이다. 사람의 심장에 당신의 마음인 성령을 심어주신다. ‘여자’는 신덕이다. 망덕의 ‘뼈와 살’은 온유(감성의 否定)와 겸손(이성의 부정)이며, 신덕의 ‘뼈와 살’은 생명과 지혜이다. 하느님께서는 온유를 영적 생명으로, 겸손을 영적 지혜로 만들어 사람에게 되돌려 주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편할 것입니다.”(마태오복음 11:29) 온유와 겸손의 멍에는 성령을 가리킨다. 온유는 욕정(감성)을 부정하는 일이며 겸손은 욕망(이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성령에서 오는 생명의 지혜가 무르익기 전에는 온유와 겸손이 불편하게 느껴지므로 ‘멍에’라고 한 것이다. ‘부모’는 욕정과 욕망, 경험과 이성, 몸과 마음으로 분열된 육적 자아를 가리킨다. 육적 자아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만들어내는 분열과 투쟁의 혼란에 빠져 있다. 이에 비하여 망덕은 영적 몸이며 신덕은 영적 마음이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일치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영적 자아는 망덕과 신덕을 겸비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자유롭고도 유일무이한 개성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다. 육적 자아는 몸과 마음의 분열을 호도하기 위해 어렵고도 복잡한 윤리체계를 개발하지만 자가당착을 끝내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몸과 마음, 경험과 이성, 욕정과 욕망이 서로 어긋나므로 그 둘이 벌거벗고 마주 대하는 것을 회피한다. 자아의 분열은 곧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 넷째 장면 (창세기 3:1-7)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짐승들 중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도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게 정말이니?”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말고는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어. 우리가 그걸 먹으면 죽는대.” 뱀이 응대하였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너희는 안 죽어.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느님을 닮아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아시기 때문이야.” 여자가 보기에 그 나무는 너무나 아름답고 열매도 탐스러웠으므로 지혜롭게 되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 열매를 따서 먹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그 열매를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들이 그것을 먹자마자 그들에게 분별력이 생겨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들을 가렸다. ‘뱀’은 오만을 상징한다. 뱀은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이지만 먹잇감을 만나면 불시에 고개를 쳐든다. 영적 자아는 외견상으로는 짐승과 똑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성령에 지속적으로 일치하여 신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오만은 육정의 의지, 곧 욕정과 욕망에 굴복하는 어리석은 의지이다. 뱀은 여자, 곧 신덕을 공격한다. 망덕은 사람의 의지이지만 신덕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행위이므로 확실치 않다. 신덕(믿음)은 사실 자주 혼동을 일으켜서 영적 자아는 미신을 신덕으로 착각하기 일쑤이다. 미신은 사람이 헛된 욕구를 추종하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허상, 곧 우상(偶像)을 믿는 행위이다. 우상은 원래 조소, 조각을 의미하지만 종교적의 의미의 우상은 건물, 장소, 주문, 교리, 전례, 지위, 인물, 책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우상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욕구가 투사된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람이 성령을 잃으면 예외 없이 미신에 빠지게 되어있다. 뱀의 질문은 왜곡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만 따먹지 말라고 하셨지 ‘모든’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성령의 자유로움은 육정을 거스르기 때문에 언뜻 사람을 구속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여자는 뱀의 질문에 장단을 맞추어 왜곡된 답변을 내놓는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육정의 유혹은 늘 일어나는 것이어서 그에 굴복하지만 않으면 오히려 신덕을 강화시킨다. 그런데 유혹이 일어나는 것은 곧 그에 굴복한 증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실제로 굴복하기 쉽다. 유혹을 마주치면 즉시 망덕에 호소하여 하느님의 지혜, 곧 성령을 구해야만 한다. 앞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신덕이 흔들리면 망덕에 의지하여야만 한다. 쉽게 말해서,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 더욱 정성스럽게 기도해야만 한다.
뱀은 드디어 사람을 하느님과 경쟁하는 관계로 몰아넣는다. 선악과를 먹는다고 당장 죽지는 않을 것 같다. 여자는 바로 그 오만 때문에 욕정에 굴복하고 나아가 욕망에 굴복한다. 나무는 아름답고 열매가 탐스럽게 보이는 것은 쾌락과 재물에 눈이 멀어 참된 생명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요, 지혜롭게 되는 즐거움을 상상하는 것은 명예와 권력에 영적 귀가 막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신덕이 무너지면 망덕도 따라서 무너진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찾을 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면 이미 죽어 있는 상태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을 리가 없다. 사람이 성령을 버리면 경험과 이성의 분별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손에 잡히는 지혜이기 때문에 당장은 유용해 보이지만 곧바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 자가당착을 가리기 위하여 도덕률, 윤리 규정, 법 등등을 만들어 앞가림을 하지만 벌거벗은 모습을 더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무화과나무 잎은 사람의 손처럼 생겨서 그것으로 앞을 가린 벌거숭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무화과나무 잎의 다섯 갈래는 육정(肉情)을 상징한다. 육정의 의지는 오체(五體=몸통과 팔과 다리)에서 일어나는 오감(五感=色聲香味觸)을 신뢰한다. 다섯째 장면 (창세기 3:8-15) 그날 저녁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그 분을 피하여 나무들 사이로 숨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당신께서 동산에 계신 기척을 듣고 제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분께서 물으셨다. “네가 벌거벗었다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일러준 그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제 옆에 두신 여자가 그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제에게 그것을 따먹으라고 꾀었습니다.” 그러자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일로 벌을 받을 것이다. 모든 짐승들 중에 너만 이 저주를 받는다. 지금부터 너는 살아가는 동안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어야 한다. 나는 너와 그 여자가 서로 미워하도록 하겠다. 여자의 후손과 너의 후손은 늘 서로 적이 되리라. 그녀의 후손은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들의 발꿈치를 물리라.” ‘저녁’은 영적 어두움이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늘’ 사람과 친밀한 관계로 어울려 살고자 하신다.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을 피하더라도 하느님은 사람을 부르신다. ‘나무들’ 사이로 숨는 것은 하느님의 친구다운 품위를 포기하였음을 자인하는 행위이다. 사람의 지혜는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하느님의 지혜를 피한다. ‘벌거벗었다고 일러준’ 것은 사람의 지혜를 따르는 어리석음이다. 사람이 즉시 마음을 돌려 망덕을 회복하기만 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하느님과 어울려 사는 영적 인간은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여자에게 핑계를 돌린다. 신덕은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배필인데 왜 일을 엽렵하게 처리하지 못하느냐는 불평이다. 즉, 스스로 하느님을 떠난 것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믿음직스럽지 못함을 탓하는 것이다. 여자는 다시 뱀에게 탓을 돌리는데, 이것은 사람에게 그러한 욕망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발로 돌 뿌리를 차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위이다. 사람은 이성의 힘으로 의지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은 스스로 참된 자유로움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만한 사람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만은 자신에게 사로잡힌 어리석은 이성이다.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시 하느님의 영을 찾지 않는다면 영원한 저주를 피할 수 없다. ‘배’는 욕정을 채우는 재료인 재물을 상징한다. ‘먼지’는 피어오르다가 잠잠해지는 사람들의 칭찬, 곧 명예를 상징한다. 사람의 지혜가 차지할 몫은 헛된 재물과 명예뿐이다. 그 댓가로 사람은 몸과 마음, 욕정과 욕망, 감성과 이성의 분열에서 오는 갈등과 투쟁을 겪어야만 한다. ‘여자의 후손’은 신덕이다. 여자는 원래 남자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는데 남자를 떠나 여자가 되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신덕과 망덕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귀한 신분을 잃고 몸과 마음이 분열된 짐승의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제 사람이 신덕과 망덕을 회복하여 다시 하느님의 아들이 되려면 ‘그 열매를 따먹었느냐?’ 라는 하느님의 물음에 똑바로 대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한 영적 투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영적 투쟁의 선봉은 신덕, 곧 성령의 지혜이다. ‘발꿈치’를 물면 상처를 입을 뿐이지만 ‘머리’를 부수면 죽는다. 영적 투쟁에서는 신덕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즉, 하느님만 믿으면 반드시 이긴다. 그러나 독뱀도 있으니 주의해야만 한다. 사람이 신덕을 잃고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여 재물과 명예를 추구한다면 그대로 죽음이다. 여섯째 장면 (창세기 3:16-19) 그리고 그분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임신의 괴로움과 출산의 고통을 더해 주리라. 그런데도 너는 계속 네 남편을 갈망하는 한편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열매를 따 먹었다. 네가 한 일 때문에 대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사는 동안 대지로부터 충분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 대지는 잡초와 가시나무를 생산하리니 너는 들풀을 먹어야만 할 것이다. 너는 네가 나온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열심히 일하여 땀을 흘려야만 흙은 조금이나마 양식을 내놓을 것이다. 너는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신덕을 잃으면 제 능력으로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 기껏 힘을 들여서 애매모호한 지식과 윤리도덕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은 갈수록 어렵고 복잡해진다. 그러니 더 좋은 지혜를 짜내기 위해 더 큰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이룬 업적을 이리저리 털어보아도 아무 이렇다 할 결과를 기대할 수조차 없다. ‘남편’은 하느님에 대한 갈망, 곧 망덕이다. 사람의 지혜(아내)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수가 없다. 그러니 사람은 결국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망덕을 잃고 아예 하느님을 떠나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죽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모른다면 그저 여느 짐승처럼 먹을 양식이나 얻기 위해 수고하다가 사라질 것이다. 사람으로서 이러한 인생을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고 계시다. 일곱째 장면 (창세기 3:20-24) 아담은 그의 아내를 하와라고 불렀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을 입히셨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닮아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구나. 그들이 생명을 주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고 영원히 살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어,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지어진 그 흙을 경작하도록 하셨다. 그런 다음 에덴의 동쪽에 케룹들과 온 방향으로 돌아가는 불 칼을 두셨다. 이것은 아무도 생명을 주는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와’는 인류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류라는 종족으로 모여 살면서 서로 협력하면서도 상호투쟁과 혼란을 되풀이한다. 개개인의 내적 분열이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짐승 가죽 옷’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이성을 가리킨다. 사람은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짐승의 신세에 머물러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누구나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죽지 않을까봐 질투하시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시종일관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지혜와 성령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즉, 사람의 지혜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이 스스로 에덴을 떠났으므로 이제부터 죽음의 악순환을 겪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분명한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계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라고 하신 것은 그분이 아들들과 함께 계심을 나타낸다. ‘우리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과 대비되는 사람의 아들을 가리킨다.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적인 지혜(성령)를 버리고 짐짓 더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의 지혜를 추종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신의 아들에게 있어서 선은 생명의 지혜이며 악은 죽음과 거짓이다. 사람의 아들에게 있어서 선은 욕구의 충족이며 악은 욕구의 좌절이다. 사람이 성령을 잃으면 그분의 아들이라는 지위에서 단순한 짐승의 처지로 몰락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사람의 회개를 촉구하는 희망의 소식이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직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닮아 있다. 경험과 이성에 의지하여 보이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짐승의 처지에 머물러 있지만 이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즉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지혜를 구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시며 그들을 격려하신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문을 열어 두셨다. 즉, 에덴을 없애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곳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이며 해는 애덕,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에덴동산 밖으로 나오셔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에덴으로 돌아가신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그리고 오직 이 방법으로만, 에덴의 동쪽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케룹’은 능력 있는 천사로서 성령의 활동을 가리킨다. 즉, 협조자 성령은 사람의 아들을 돕기 위하여 미리부터 에덴의 관문에서 대기하고 있다. 성령은 회개한 사람으로 하여금 육정에 집착하는 거짓 본성을 벗어버리고 영적 본성을 회복하도록 용기를 주는 동시에 영적 자아의 깨달음을 준다. ‘온 방향으로 돌아가는 불 칼’을 통과하려면 자신을 완전히 부정(否定)해야만 한다. ‘칼’은 욕망을 끊어 흐트러뜨리며 ‘불’은 욕정을 태워 없앤다. 둘 다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아무도’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팔짱을 끼고 세상에서 떨어진 곳에서 바라만 보고 계시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능력, 지혜, 지위, 신분 등의 겉모습을 기준으로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신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행동을 낱낱이 기록해 두신 다음 나중에 각자의 공로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판결하는 권력자이시다 등등, 이처럼 하느님을 제멋대로 상상하면서 회개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 곧 회개한 사람에게 그분께서는 먼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다. 이때 이 세상은 곧 에덴동산이다. 하느님과 함께 수행하는 영적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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