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여행67: 헤로데 집안과 로마 통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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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4-30 | 조회수9,121 | 추천수3 | |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7) 헤로데 집안과 로마 통치 예수님 시대, 대제국 아래 혼돈의 시대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나타날 때마다 대충 넘어가는 이름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야고보이고, 다른 하나가 헤로데입니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는 연대도 혼란스러워서 아버지 헤로데를 말하는 것인지 아들 헤로데를 말하는 것인지 왔다 갔다 하고, 아버지든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얼버무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은 그 헤로데 집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복잡합니다. 하스몬 왕조 안에서만 복잡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복잡합니다. 루카 복음 3장 1-2절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나타난 것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로마 황제와 유다 총독에다 갈릴래아 영주까지 개입하니 제가 그 땅의 백성이라면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를 것 같습니다.
큰 그림을 그려보면, 당시의 대제국은 로마이고 기원전 63년 이래 유다를 지배한 것도 결국은 로마입니다. 그 아래에서 누가 실세가 되느냐, 이것이 문제이지요. 로마에서 팔레스티나에 처음 개입한 것은 폼페이우스였습니다. 하스몬 왕조에서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히르카노스 2세 형제가 서로 대립하면서, 각각 폼페이우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2세의 편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히르카노스 2세가 끝까지 폼페이우스에게 충실했던 것도 아닙니다. 로마의 정치 변동 속에서 히르카노스 2세와 그의 신하 안티파테르는 카이사르에게 돌아서서 필요한 때에 그를 돕고는 그 보답으로 팔레스티나에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히르카노스 2세의 싸움 사이에서 진정한 승자는 안티파테르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안티파테르는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로데(미래의 헤로데 대왕)은 각각 유다와 갈릴래아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가 그들에게 요직을 차지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로 로마의 정치 상황은 끊임없이 변해 갔고 팔레스티나에서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의 무력 봉기로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그 속에서도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는 로마로 가서 안토니우스의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하고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때에는 아직 안티고노스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37년에는 헤로데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임금이었던 헤로데는 이 헤로데 대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는 기원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이전이라는 이야기지요.
헤로데의 통치는 정략적이고 잔인했습니다. 로마의 지지로 유다에서 권력을 잡았던 그가 손해들을 감수해 가면서도 로마의 호의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두매아 출신이었던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크게 개축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라고 말하지요. 그것이 헤로데 대왕이 짓게 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충실한 유다인들은 그를 미워했고, 오히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유다인들이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고 항구를 건설하여 카이사리아라고 명명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히르카노스 2세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하스몬 집안을 경계하고 미워하여 마리암네와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나오는,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하는 헤로데의 모습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로데 사후에는 그의 세 아들이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는데, 폭정에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폐위를 요청하여 결국 아르켈라오스는 기원후 6년에 쫓겨났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 총독에게 맡겨졌습니다. 그 총독들 가운데 하나가 기원후 26~36년에 다스렸던 본시오 빌라도입니다.
둘째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로이아를 통치했고,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의 수난 때에 등장하는 헤로데가 바로 이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처럼 건축 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티베리아스를 건설했습니다. 이복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요한 세례자에게 비난을 받은 것이 바로 그인데, 그는 39년에 칼리굴라 황제에 의하여 갈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셋째 아들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필리포스가 세상을 떠난 후 시리아에 귀속되었던 그의 영토와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영토는 결국 헤로데 대왕의 손자인 아그리파스 1세에게 넘어갑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로마 총독이 다스리던 사마리아, 유다, 이두매아 땅까지 그에게 주었으므로, 그는 결국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지역 전체의 임금이 됩니다(기원후 41년). 아그리파스 1세 자신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이었지만 유다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고, 바로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여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는 4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44년 이후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아는 66년까지 계속 로마 총독이 통치했고, 전에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영토와 아빌레네 정도만을 아그리파스 1세의 아들 아그리파스 2세가 다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사셨던 시대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복잡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속에서 백성은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평화신문, 2016년 5월 1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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