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이스라엘 이야기: 요시야 임금과 여예언자 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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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5-01 | 조회수8,558 | 추천수1 | |
[이스라엘 이야기] 요시야 임금과 여예언자 훌다 성전서 찾은 두루마리 읽고 종교 개혁 나서
- 요시야 임금이 전사한 므기또 유적지.
기원전 7세기로 돌아가 보자. 이스라엘에서는 남왕국의 위대한 임금 요시야와 여예언자 훌다를 만날 수 있다. 요시야는 여덟 살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2열왕 22,1), 성경에서 한 번도 흠을 꼬집은 적이 없는 유일한 임금이다. 특히 그는 우상 숭배로 물든 이스라엘 종교를 개혁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곳저곳 세워 놓은 산당을 모두 없애고, 종교 전례를 예루살렘 성전 한곳으로만 집중시켰던 것이다(2열왕 23,4-20). 요시야는 부전자승(父傳子承)이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아버지 아몬이나 조부 므나쎄와 달리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행적은 오히려 증조부 히즈키야를 떠올리게 한다.
히즈키야도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없애,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2열왕 18,4). 사실 산당이 처음부터 부정한 곳은 아니었다. 성전을 봉헌하기 전에는 사무엘(1사무 9,12-13)이나 솔로몬(1열왕 3,2-3)도 산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산당이 불법이 된 건, 가나안의 악습이 되살아나거나 이방 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우상 숭배 장소로 타락했기 때문이다(1열왕 14,23-24; 2열왕 21,2-3 등 참조).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단행하게 된 계기는 성전에서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대사제 힐키야를 감독으로 두고, 성전을 정화·보수하던 참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 많은 백성이 헌금했으며, 그 돈으로 일꾼들 보수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율법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것이다(2열왕 22,3-9). 힐키야는 발견한 두루마리를 서기관 사판에게 주어, 요시야 임금에게 읽어 주도록 했다. 요시야는 사판이 낭독하는 두루마리의 율법을 듣고, 유다 백성이 행하던 관습과 너무 달라 옷을 찢으며 애도했다(2열왕 22,13). 옷을 찢는 건 몸의 일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상징한다. 아버지와 조부의 우상 숭배로 백성이 잘못된 길로 빠졌다는 사실을 통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의 율법이 아직도 유효한 건지 하느님께 문의해 보기로 결정한다.
당시 유다에는 예레미야와 스바니야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두 예언자 모두 아시리아 점성술을 근절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바로 세우는데 노력한 이들이다. 그런데 요시야는 그 둘을 제치고 여예언자 훌다에게 고위층 사절단을 보냈다(2열왕 22,14). 남성위주 사회였는데도 여인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물어보다니 신기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훌다가 두루마리의 권위를 인정하자, 요시야는 군말 없이 그 율법대로 산당을 없애는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 다윗 성채 박물관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훌다 게이트 유적.
학자들은 성전에서 발견한 두루마리가 신명기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단 요시야 임금이 행한 종교 개혁 내용이 신명기 율법(12,1-11 등)과 일치한다. 요시야가 주재한 파스카 축제(2열왕 23,21-23)도 탈출 12장보다는 신명 16,1-8을 따른 것이다. 탈출기는 각 가정에서 파스카를 지낼 것을 규정하지만, 신명기는 주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신 곳, 곧 예루살렘에서만 지내야 한다고 율법을 수정하고 있다. 요시야가 파스카를 지낸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자 예언자들을 제치고 훌다에게 문의한 건 참으로 수수께끼다. 구약 시대 활동한 여예언자는 총 다섯으로, 손에 꼽을 만큼 소수다. 훌다를 뺀 넷은 미르얌(탈출 15,20), 드보라(판관 4-5장), 이사야의 아내(이사 8,3), 노아드야(느헤 6,14)다. 탈무드는 훌다가 예레미야의 친척이었다고 전한다(메길라 14b). 곧, 자기 친척이라서, 요시야 임금이 훌다를 대신 찾아도 예레미야가 서운해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유다 전승 다른 하나는, 남자보다는 여자인 훌다가 주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더 적당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아람어 성경(타르굼)은 훌다가 예루살렘에서 교육 기관을 운영했다고 덧붙여 엘리트였음을 암시했다. 요시야가 훌다를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훌다의 영향력과 중요성은 예루살렘 성전에 반영되어 ‘훌다 문’이라 불리는 게이트가 있었다. 지금도 그 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더니, 훌다는 성전 문에 자기 이름을 새겨 명성을 제대로 남긴 셈이다. 그리고 조상과 백성의 죄를 고백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한 요시야 임금은 훌다의 신탁대로(2열왕 22,20: “내가 이곳에 내릴 모든 재앙을 네 눈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유다 왕국이 몰락하는 비극(기원전 587/6년)은 보지 않고 죽었다.
* 김명숙(소피아) -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일, 김명숙(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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