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여행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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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5-14 | 조회수8,579 | 추천수1 | |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권력에 타협한 사두가이 · 율법에 얽매인 바리사이
- 로마니노(1484?~1559?) 작,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가신 예수님’.
복음서에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계속해서 등장하지요. 이들은 유다교 내의 주요한 종교 집단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주 그들의 주장과 대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던 사두가이파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했고, 이후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차독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두가이들이 실제 차독의 후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모든 사제가 사두가이였던 것도 아니고, 지방의 사제들은 오히려 바리사이에 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에 속한 사제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고, 일부 사제들은 귀족으로서 계속 정치에 개입하고 지배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외세와 타협했던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열심한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개방적이었습니다. 외세의 임금들이 뇌물을 받고 야손과 메넬라오스 등을 대사제로 임명했을 때 사두가이는 이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주고 대사제로 임명된 이들이나 하스몬 집안 출신의 대사제들은 백성들에게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는 처음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 후에는 하스몬 왕조와, 마지막에는 로마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도 산헤드린은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같은 편에 서지요.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누구하고든 타협했습니다.
교리적인 면에서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했던 구전 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확인되지 않거나 불분명한 교리들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유다교에서 발전했던 천사와 악마에 관한 여러 내용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현실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신학이 그만큼 더 현세를 중시하게 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보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반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들이 바리사이들에 비해 드물게 언급되는 것은, 신약 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이미 그들이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1세기 이후에 다시 재건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사제 계층이 다시 일어날 수 없었지만, 지금도 회당 예배의 몇 가지 역할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편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름은 아마도, 하스몬 왕조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감에 따라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멀리하고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달리 이들은 성문 율법 외에 구두로 전해진 율법도 존중하였고,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등을 믿었으며,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두가이들에 비해 현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세속화되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이들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구전 전승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많은 유다인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따라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사이들을 처음부터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도 율법을 준수하고자 노력하였고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기간에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 집단이 바로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자주 바리사이들을 위선적이고 냉혹한 율법주의자들로 제시한다. … 그러나, 복음서들에 나타난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간의 계속된 후대의 논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교황청 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리사이의 가르침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열성이 오도되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할 때,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적인 관습에 매이게 될 때 오히려 율법의 근본 정신을 거슬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요인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대립이 자주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 흩어진 이스라엘이 이천 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과 일상의 여러 규범 때문이었고,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은 바리사이였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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