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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경, 문화와 영성20-21: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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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12 조회수15,708 추천수1
파일첨부 렘브란트_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1.jpg [1,444]   렘브란트_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2.jpg [1,035]  

성경, 문화와 영성 (20)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 (1)

 

 

복음서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 사건을 기쁜 소식으로 전하며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해석한다. 따라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는 예수님 사건의 해석자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다는 것은 예수님 사건이 가지는 과거의 의미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를 읽는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사가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탁월한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렘브란트의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

 

●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1606년에 태어나 성장한 렘브란트는 1631년부터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활동하게 된다. 그곳에서의 활동 초기에 그는 성경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렸다. 1633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는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160×127cm의 크기이다.

 

● 이 작품은 미국 보스톤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990년 3월 18일에 도난당했다. 당시 도둑들은 경찰복장을 하고 박물관에 침입해서 이 그림과 다른 12점의 작품을 훔쳐갔다.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 중에 있으며 박물관은 렘브란트의 그림이 있었던 그 위치에 빈 액자만을 전시하고 있다.

 

 

■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 이야기

 

● 예수님이 사셨던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티나는 지리적으로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와 요르단 강을 동쪽 경계로 하는 갈릴래아 지방, 그 남쪽은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그 남쪽은 유다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갈릴래아 호수는 성경에서 킨네렛 호수, 티베리아스 호수, 겐네사렛 호수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호수의 동서의 너비 중 가장 넓은 데가 약 12km이고 남북 길이는 약 21km로서 전체 호수의 둘레는 52km 정도이며, 호수의 수심은 약 40m이다. 호수 주변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호수의 수면은 통상 평온하지만 강한 바람이 산 사이로 불면 갑작스런 돌풍으로 큰 파도가 일어나기도 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러한 자연 현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풍랑 이야기(마태 8,23-27; 마르 4,35-41; 루카 8,22-25)의 배경이 된다. 기원후 1세기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의 힘에 의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마르 4,35-41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우리 본문의 시작인 35절에서 시간적인 배경이 바뀌는데 “그날 저녁이 되자”로 표현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신다. 따라서 우리 본문은 갈릴래아 호수라는 공간적인 배경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탄 배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여기서 호수 저쪽은 이방인들의 지역인 데카폴리스 지방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군중을 남겨 둔 채 제자들과 함께 같은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가신다. 이제 한 배를 탄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명 공동체이다. 그런데 호수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 물이 배 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이 이야기는 호수의 풍랑을 통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묘사한다. 혼돈 세력의 파괴적인 힘은 살아있는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며 자연 세계 안에서 여전히 활동적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을 이러한 위급한 순간에 처하게 하신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38절)

 

마침내 예수님은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에게 명령하신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이 명령은 구약 성경(시편 104,7; 이사 17,13)에서 하느님이 혼돈의 물을 복종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을 회상케 한다. 풍랑을 가라앉히는 것과 관련된 표현은 “당신 힘으로 바다를 놀라게 하시고 당신 통찰로 라합을 쳐부수셨네.”(욥 26,12)와 “당신께서는 오만한 바다를 다스리시고 파도가 솟구칠 때 그것을 잠잠케 하십니다.”(시편 89,10)에서 발견된다. 엄청난 바다의 풍랑처럼 파괴적인 자연의 힘인 혼돈의 물은 생명을 위협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통제된다. 하느님은 혼돈의 물을 가라앉히고 제한하기 때문에 세상은 살아있는 피조물을 위한 안전한 환경이 된다. 이와 같이 언제든 창조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혼돈의 물은 창조주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되어야 한다. 혼돈에 대하여 창조주 하느님이 꾸짖으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꾸짖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혼돈에 거슬러 창조 세계의 평화를 안전하게 하신다. 그러자 바람과 호수는 예수님에게 복종한다. 이렇게 하여 앞선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는 해결된다. 이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다. 우리 본문에서 일어난 변화는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분은 당신 말씀으로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여기서 겁과 믿음은 대조를 이룬다. 겁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같은 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분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순간에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본문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끝난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41절) 제자들의 이 말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의 몰이해라는 모티프와 관련 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참된 제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본문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의 몰이해는 겁, 두려움, 믿음 없음, 깨닫지 못함, 완고한 마음 등으로 묘사된다.

 

이 복음서 본문을 읽는 오늘의 독자인 우리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사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제자들의 긍정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에서도 공감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몰이해했던 제자들처럼 오늘의 우리도 그러하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읽고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우리이지만 아직도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 믿음이 없고 깨닫지 못하며 마음이 완고하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과 함께 탄 배에서 풍랑을 만난다면 어떤 행동을 할까? 17세기의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는 복음서에 나오는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가?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r/rembrand/11biblic/12newtet.jpg)

 

[월간빛, 2016년 8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경, 문화와 영성 (21)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 (2)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다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 이야기를 위대한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1633년에 그린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에서 그 의미를 탁월하게 해석한다. 우리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후 복음서의 “풍랑 이야기”의 신학적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 렘브란트의 해석

 

● 렘브란트는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집어삼키듯 덮치는 긴장된 순간의 장면을 특유의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 명암법으로 표현한다. 배에 부딪치는 그림 왼쪽 부분의 흰 파도와 오른쪽 부분의 어둠이 대조를 이룬다. 그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돛대의 끝과 호수의 파도로 말미암아 45도 가량 들려 있는 배의 앞머리, 그리고 그림 오른쪽의 배의 뒷머리는 전체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림 왼쪽, 곧 배의 앞부분에 돛대를 중심으로 다섯 인물이 있고, 그림 오른쪽, 곧 배의 뒷부분에 예수님과 함께 여섯 인물이 있으며, 이 두 부분 사이에 두 인물이 있다. 그래서 그림의 배에는 예수님을 포함하여 전체 열네 명이 표현되어 있다. 배에 탄 이들은 이 위급한 순간에 각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가?

 

● 배의 앞머리에 엄청난 파도가 들이치고 있다. 배 안으로 물이 덮쳐온다. 렘브란트는 복음서에서 표현된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마르 4,37)의 순간을 묘사한다. 돛줄이 끊어지기도 하고 돛이 찢어져 있기도 하다. 돛대 주변의 다섯 사람은 이 거친 풍랑에서 배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림의 가장 왼쪽에 있는 이는 돛줄을 붙들고 돛을 내리려 한다. 그리고 돛대 주변의 사람들은 돛을 붙잡고, 기울어지는 돛대를 지탱하려 한다. 다른 한 사람은 오른손으로 돛줄을 잡고 왼손으로는 자신을 덮치는 물을 막고 있다. 이러한 행동들이 강력한 자연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최선을 다해 위기에 처한 배를 구하려 노력한다. 그림에서 돛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옷은 밝은 색들로 표현된다.

 

● 렘브란트는 그림의 중앙에 두 인물을 배치한다. 한 사람은 바닥에 앉아 배 안에 가득 찬 물을 바깥으로 퍼내려 한다. 그리고 푸른색의 옷을 입은 다른 한 사람은 오른손으로 돛줄을 잡고 왼손으로는 바람에 날아 갈까봐 자신의 모자를 붙잡고 있다. 그는 기울어진 배에서 돛줄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있으며, 배 전체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한갓 자신의 모자를 지키려 한다. 비평가들은 이 인물을 렘브란트 자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나의 모습이 바로 당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그림의 왼쪽 부분과는 달리 오른쪽, 곧 배의 뒷부분은 차분한 분위기이다. 인물들의 옷 색깔은 어둡다. 예수님 주변에 여섯 인물이 있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에 대한 이 인물들의 각기 다른 반응을 제시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마르 4,38)라고 표현된 순간을 렘브란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는 듯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8) 한 제자는 예수님을 깨우려고 손을 내밀고 있다. 예수님은 오른손을 당신 가슴에 두시고 매우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분은 당신을 깨우려던 두 제자를 바라보고 계신다. 다른 두 제자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기도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공포에 질린 시선을 호수의 파도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 중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빨간 옷을 입고 있는 한 인물은 심한 배 멀미로 구토를 하고 있다. 그림의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배의 키를 잡고 있다. 그는 키를 잡고 있기는 하지만 배의 방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배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도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그는 두려움이 없는 모습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과연 우리는 누구와 동일시될 수 있을까?

 

 

■ 풍랑 이야기의 신학적 의미

 

●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인간과 창조 세계 사이의 상호 관련성 안에서 표현된다. 곧 구원은 창조에 대한 대체가 아니라 “창조 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서의 풍랑 이야기는 하나의 “그리스도론적 생태 담론”이다.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는 자연에 대한 통제가 하느님의 질서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킨다. 이 이야기는 호수의 풍랑을 통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적대적 갈등 관계를 묘사한다. 혼돈 세력의 파괴적인 힘은 살아있는 피조물에게 고통을 주며 자연 세계 안에서 여전히 활동적이다. 이 파괴적 힘은 하느님에 의해 마침내 평정될 것이다. 하느님은 혼돈의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하느님은 자연의 파괴적 폭력에 대하여 당신의 파괴적 폭력으로 맞서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무질서를 평정하고 평화롭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창조를 다시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풍랑 이야기는 장차 완성될 새로운 창조 세계를 미리 보여주고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창조 세계 안에서 혼돈의 힘을 평정하시는 분이시다.

 

● 예수님의 풍랑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 문명의 실상을 폭로한다. 현대 세계의 거대한 과학 기술적 계획은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시도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전능에 속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대로 자연을 복종시키고 창조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기술에 의한 세계의 재-창조로써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현대의 거대 담론이 생겨났다. 그러나 자연의 힘에 대한 통제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는 오히려 인간 자신과 창조 세계에 대한 엄청난 재앙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 자연에 대한 통제에 있어 인간은 하느님에게 의존적이다. 인간은 단지 피조물로서 그것에 참여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가진다. 전능한 인간이 세상을 마음대로 다시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찬탈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 권력에의 의지, 하느님의 참된 창조성에 대한 반항은 결국 질서가 아닌 혼돈을 낳는다. 따라서 이러한 혼돈을 제한하고 창조의 조화를 증진하여 자연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창조 세계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피조성을 인식하는 것이 요구된다.

 

[월간빛, 2016년 9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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