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 여행12: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마르 4,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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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8-21 | 조회수5,724 | 추천수1 | |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2)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마르 4,41) 말 한마디로 풍랑 잠재우신 분은 하느님의 아들
-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그리스도’, 12세기, 산마르코 성당,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처=굿뉴스 가톨릭갤러리.
공관 복음을 읽다 보면 내용상으로 비슷한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용뿐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는 순서 역시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 4장 35절부터 이야기되는 내용이 그중 하나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 모두 거의 같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고, 순서도 풍랑을 가라앉힌 예수님, 마귀들과 돼지 떼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군중을 남겨둔 채 호수의 건너편을 향해 갑니다. 배를 어느 정도 저어갔을 때 돌풍이 몰아쳐 배 안에 물이 차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갈릴래아 호수에는 자주 골란고원에서 내려오는 돌풍이 불어 호수의 물살이 거세지기도 합니다. 골란고원은 보통 해발 1000m 정도이며 갈릴래아 호수는 해저 200m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타고 있던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불안에 떨며 예수님께 죽게 됐다고 말합니다. 공관 복음은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었다고 공통적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이내 바람은 잦아들고 호수는 다시 고요해집니다. 마르코 복음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아직 또는 여전히 제자들이 믿음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의 말씀입니다. 마태오와 루카 모두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제자들이 굳은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을 질책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풍랑을 가라앉힌 예수님의 이야기는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는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여전히 믿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전하는 게라사 지방에서 한 이야기 역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게라사’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유다인들이 부정한 동물로 생각했던 돼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레위 11,7 참조) 이방인의 지역이나 이방인의 문화와 접촉이 많던 곳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이와 마주치자 그가 보이는 행동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기를 청하고 결국 그렇게 됐지만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고을에 살던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들에게서 떠나 주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근처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원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 한마디로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신 예수님, 그리고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활동했던 제자들이지만 풍랑 앞에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 이후에 복음서들이 전하는 것은 악령의 고백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보자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대조되는 것은 제자들과 악령들의 모습입니다. 아직 굳건한 믿음을 갖지 못한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악령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서들은 자연이 복종하고 악령들조차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큰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전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라는 놀라움과 악령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하느님의 아드님”은 서로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바람과 호수도 복종하는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그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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