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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히브리어 산책: 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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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05 조회수8,538 추천수1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벤, 아들


‘내 아들’이란 지혜 지식 믿음을 계승하는 사람 뜻해

 

 

- 벤(단수형). 아들을 뜻하는 말이다. 히브리어 기초 단어로서, 매우 쓰임새가 넓다.

 

 

히브리어로 ‘벤’은 ‘아들’이고, 복수형은 ‘바님’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잇는 존재로서,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을 나눈다. 하느님의 바님으로서 이 말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알아보자.

 

 

사람의 자손, 짐승의 새끼

 

벤은 구약성경에 4850번 이상 등장하는 중요 단어로서, 기본적으로 친아들, 양아들, 손자 등 ‘집안의 모든 아들’을 의미하고, 다양한 맥락과 비유에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그 다채로운 의미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벤은 남녀 자손을 대표하는 말이다. 원죄의 결과로 여성은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창세 3,16)는 말씀을 들어야 했는데, 이 말에서 ‘자식들’로 옮긴 말이 바님이다. 일찍이 고대 번역본들은 물론이고 현대어 번역본들도 빠짐없이 이 바님을 ‘아들들’이 아니라 ‘자식들’(children)로 옮긴다.

 

이렇게 벤은 여성 후손을 포함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롯의 바님’(신명 2,9.19), ‘요셉의 바님, 곧 에프라임의 바님’(민수 1,32), ‘암몬의 바님’(2사무 8,12 등), ‘이스라엘의 바님’(탈출 1,7 등)에서 바님은 전부 ‘아들들’이 아니라 ‘자손들’을 뜻한다.

 

짐승의 새끼도 벤이라고 했다. 우리말로 “송아지”(창세 18,7; 레위 9,2), “어린 양”(시편 114,4), “새끼 나귀”(창세 49,11), “(새의) 새끼”(신명 22,6) 등은 히브리어로 저마다 ‘소의 벤’, ‘양의 벤’, ‘나귀의 벤’, ‘(새의) 벤’이다.

 

- 바님(복수형). 벤의 복수형이다. ‘아들(들)’, ‘제자(들)’, ‘자녀(들)’, ‘후손(들)’ 등으로 다양하게 새긴다.

 

 

뻗어 나가는 것

 

벤은 사물과 식물에도 쓰였다. 히브리어로 화살은 ‘헤츠’라고 하는데, 이따금 이 말 대신 ‘활의 벤’(욥기 41,20)과 ‘화살통의 벤’(애가 3,13)이라고 했다(우리말로는 모두 ‘화살’로 옮긴다).

 

야곱은 죽기 전에 12지파를 모두 축복하는데, 그중에 요셉 지파를 두 번이나 “열매 많은 나무”(창세 49,22)로 부른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열매의 벤’인데, (열매가 많이 열린) 나뭇가지를 벤에 빗댄 것이다.

 

벤과 관련된 이런 비유적 표현을 보면, ‘몸통에서 갈려나가는 것’을 칭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화살은 활이나 화살통에서 뻗어 나가는 것이요, 나뭇가지는 줄기에서 갈려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몸통을 연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들(벤)이다.

 

 

정체성을 전승하다

 

벤은 정체성을 계승한다. 사회적 불의에 민감하게 저항했던 예언자 아모스는 스스로를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아모 7,14)고 겸손되이 칭했는데 ‘예언자의 제자’로 옮긴 말은 ‘예언자의 벤’이다. 이런 식으로 ‘아론의 벤’, ‘유다의 벤’, ‘지혜의 벤’ 등등 ‘…의 벤’이라는 표현을 구약성경에서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은 문맥을 봐서 적절히 ‘…의 아들(들)’, ‘…의 자손(들)’, ‘…의 제자(들)’ 등으로 옮긴다.

 

그러므로 ‘내 아들’이라는 표현은 육친의 관계를 훨씬 넘는 표현이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자. 어린 사무엘은 꿈에서 하느님이 부르셨지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스승 엘리에게 거듭 달려갔다. 이 장면에서 엘리는 제자 사무엘을 ‘나의 벤 사무엘’(1사무 3.16)이라 부른다.

 

브니 “나의 아들”. ‘나의 아들’이란 의미로, ‘브니-’로 읽는다. 장음 ‘이-’는 ‘나의’라는 뜻이다. 육친의 아들은 물론이고 지식, 지혜, 믿음 등을 계승하는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이 말을 썼다.

 

 

엘리와 사무엘은 피가 섞인 사이가 아니지만,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잠언에서 거듭하여 “내 아들아”(잠언 2,1; 3,1 등)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아들’은 단순히 내 피를 잇는 사람이라기보다 내 지혜, 내 지식, 내 믿음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녀

 

벤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가 하느님의 바님’이라는 고백에서 정점에 이른다. 일찍이 모세는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자녀들이다”(신명 14,1)고 가르쳤고, 호세아 예언자(호세 2,1)도 같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시대에 ‘피의 자녀’보다 ‘믿음의 자녀’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런 성찰은 신약성경에서 본격적으로 도약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이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로마 8,14-23; 갈라 4,4-7), ‘하느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의 호칭이다(요한 1,12; 11,52). 그들은 결국 부활에 동참할 것이다(루카 20,35).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평소에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에페 5,1).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 부르셨다(마태 5,9).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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