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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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09-16 | 조회수6,760 | 추천수1 | |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지난 대선의 표어 가운데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있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과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떠올리는 표어였다. 성경에서는 이 말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 6,6; 마태 9,13 참조)라는 말씀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이는 옛 이스라엘인들이 성전에는 비싼 제물을 바치면서, 한 끼조차 먹기 어려운 이웃은 모른 척하는 위선을 꼬집은 구절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무한경쟁의 논리로 약자를 희생하여 이룩한 경제발전을 선(善)인 듯 포장하는 위선과 같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참제물은 큰돈 들이는 예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살리는 자비임을 성경은 여러 번 강조한다.
인신제에서 동물 제사로
하느님의 자비는 오랜 세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인간에게 드러났다. 경신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이사악 번제 사건(창세 22,1-19)으로 인신제를 없애고 동물 제사로 바꾸신 데에서 드러난다. 고대 가나안 사람들은 신이 자기 소원을 들어주게 하려면 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고 여겨, 자식을 제물로 삼기도 했다(2열왕 3,27 등 참조).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인신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벤 힌놈 골짜기에서다(2열왕 23,10 등 참조).
인신제를 금지하는 율법이 모세오경에 여러 차례 나오지만(레위 18,21; 신명 18,10-11 등),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을 흉내내어 한동안 인신제를 근절하지 못했다. 벤 힌놈 골짜기에 붙은 “토펫”(예레 7,31)이라는 이름에서 그 잔인성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토펫은 아람어에 기초하여 ‘가마’ 또는 ‘화덕’으로 추정한다. 자식을 불사르던 의식을 연상시키는 어원이다. 또는 히브리 어원으로 보아 ‘북을 치다.’로도 풀이한다. 제물로 바친 아이의 비명을 북소리로 묻으려 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벤 힌놈 골짜기가 ‘게헨나’로 발전하여 지옥의 상징이 된다(마태 5,29; 10,28 등).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사악 대신 숫양을 주시어, 잔인한 인신제를 없애고 짐승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악습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브라함은 숫양을 대신 바친 장소를 ‘야훼이레’라 이름 붙였는데, ‘야훼께서 보시다.’ 곧 ‘야훼께서 필요한 걸 살펴 채워주신다.’는 뜻이다. 이사악 번제 사건은 훗날 하느님께서 베푸실 가장 큰 자비의 사건, 곧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내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예표였다.
동물 제사
하느님께 예물과 제물로 바치도록 모세오경이 규정한 동물 제사에는 번제, 친교제, 속죄제, 보상제가 있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하며, 어원은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연기가 하늘까지 오르는 모습을 상징하는 말로, 완전히 살라 바치는 제물을 가리킨다(탈출 29,18 참조). 친교제는 자유의지로 바치는 제사였다. 곧, 정해진 의무 없이 감사 예물(레위 7,15)로, 자원(自願) 예물(에제 46,12)로, 서원 제물(레위 7,16)로 다양하게 짐승을 봉헌할 수 있었다. 친교 제물은 성경에서 번제물과 쌍으로 자주 등장하는데(탈출 20,24; 민수 10,10 등), 번제물과 달리 봉헌자가 먹을 수 있었다(신명 27,7 참조). 그러므로 완전히 살라 바치는 번제물은 하느님께 온전히 올라가는 제물이고, 제사 뒤에 먹을 수 있는 친교 제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애정과 자비의 상징이었다.
속죄제는 제단과 같은 성스러운 기물을 정화하거나(에제 43,18-27 등 참조), 백성의 죄를 씻을 때 바쳤다(레위 4,14 참조). 곧, 속죄 제물이 성물의 오염이나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봉헌자는 속죄 제물에 손을 얹어, 상징적으로 자기 죄를 옮겨 담는 절차를 거쳤다(레위 4,4.15 등 참조). 보상제는 무의식 가운데 죄를 범했거나, 성물 또는 거룩한 제물을 잘못 다루어 훼손한 경우, 손상을 보상하는 목적이었다(레위 5,15-19 참조). 잘못된 서약이나 거짓 맹세를 한 경우에도 이 제물을 바쳐 보상했다(레위 5,21-26 참조). 이때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어야 했는데, 더러운 걸레로 방을 닦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훗날 예수님께서 희생 제사를 모두 완성하신 다음에는 이런 동물 제사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히브 7,27).
하느님께서 이런 예물과 제물을 규정해 주신 것은, 백성이 감사의 마음을 표하거나 죄를 씻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신께서 자비롭게 우리 죄를 용서하시듯,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며 살라는 의미였다(레위 19,18 참조). 그런데 기원전 8세기부터 이런 제사가 의미를 잃고 형식으로 치우치기 시작한다. 경신례의 중심인 성전도 “강도들의 소굴”(예레 7,11)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이런 위기를 우려하여 첫 목소리를 낸 선구자가 등장했는데, 바로 아모스 예언자였다.
아모스의 등장
아모스는 트코아 출신이었다(아모 1,1). 트코아는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성읍이다. 남왕국 출신인 아모스가 북왕국에서 활동했으니, 당시에는 남북을 오가는 것이 자유로웠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두 왕국이 여전히 한 겨레임을 보여주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아모스 같은 선구자가 나올 때는 그만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은 본디 지파 중심의 평등 사회였지만, 왕정과 함께 귀족층이 생겨난 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하실 때는 공정과 정의를 지키라며 율법을 주셨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부유층이 그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며 약자층을 착취한 것이다(이사 5,8; 아모 2,6 참조). 그래서 마침내 주님의 말씀을 찾아도 들을 수 없고(아모 8,12), 세상이 악해져 뜻있는 사람이 입을 다무는 암울함이 닥쳤다(아모 5,13).
이스라엘을 흔들기 시작한 부정부패는 경신례 형식에만 집중하는 가운데 도덕과 윤리를 경시하는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곧, 성전에 값비싼 제물만 바치면 죄를 용서받고 율법 도리를 다하는 거라 생각했기에(이사 1,11-17), 고아와 과부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무시했다(이사 1,23; 예레 22,3 등). 이런 불공정이 극에 달하자, 아모스를 비롯한 예언자들에게서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당시 북왕국을 다스린 예로보암 2세는 유능한 장수였다. 북왕국이 아람과 벌여오던 전쟁도 그의 시대에 끝난다. 아시리아의 팽창정책에 눌려 아람이 약해진 시점이라, 북왕국은 빼앗긴 영토도 수복할 수 있었다(2열왕 14,25). 남왕국과도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남왕국도 우찌야 임금 통치 아래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암몬 라빠를 정복하고, ‘임금의 큰길’이라는 대상로 남쪽도 장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두 왕국을 위협할 외세도 없어, 그야말로 솔로몬 시대에 견줄만한 번영이 찾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부가 늘어남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렸다(아모 5,11-12; 8,4). 전쟁으로 이익 본 이들이 땅과 집을 마구 사들이면서, 많은 백성이 노예로 전락하거나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아모 2,6; 8,6 참조). 곧, 남북 왕국에 타락을 유발한 주요인이 바로 경제적 번영이었으니, 생활이 너무 편하고 풍요로우면 하느님을 망각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신명 32,15과 잠언 30,8-9을 떠올리게 한다. 물질적으로 안정되면 마음이 넓어지고 하느님도 찾기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결과가 자주 나타난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비슷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겉치레뿐인 예배
이스라엘에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전례도 피상적으로 치를 뿐 전례의 기본 정신인 공정과 정의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사 1,11.15에 이런 꾸짖음이 나온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지배층은 뇌물을 받아 판결을 내리고, 예언자들은 예언을 밥벌이로 생각하는 ‘꾼’들이 많아져 복채에 따라 점을 쳤다(미카 3,5.11 등 참조). 곧, 민생을 우선에 두어야 할 종교 지도자 또는 사회 지도자들이 이익 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사실 주님의 뜻을 문의하러 예언자에게 갈 때마다 대가를 지불하는 관습은 예전에도 있었다. 사울은 사분의 일 세켈을 준비하여 사무엘을 찾아갔고(1사무 9,8), 북왕국 태조 예로보암의 왕비는 빵이나 과자와 꿀 등을 챙겨 아히야 예언자를 방문했다(1열왕 14,1-3). 하지만 이런 보수 제도가 세속화되어 버린 것이다.
아모스는 이런 현상을 꼬집으며, 자신은 돈 받고 신탁을 내리는 직업 예언자가 아니라고 강조했다(아모 7,12.14). 호세아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라고 부르짖었다(호세 6,6). 하지만 예언자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남북 이스라엘은 결국 망국적 부정부패로 몰락하고, 제1 성전도 무너지게 된다.
희생 제물보다 자비다
제2 성전시대에는 예수님께서 같은 가르침을 이어가신다. 라삐(율법학자)가 세리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 예수님은 한집에서 거리낌 없이 그들과 음식을 나누셨다. 그걸 보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자, 예수님께서는 호세 6,6을 인용하시며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라는 말씀으로 반박하셨다. 곧, 율법을 들먹이며 단죄만 하지 말고,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라는 꾸짖음이었다.
희생 제물을 바치는 목적은 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회개를 위해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듯, 희생 제사도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의 자비로 채울 수 있도록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 정신인 자비심을 잃으면, ‘앙꼬’ 없는 빵처럼 가치를 잃는다는 걸 깨우쳐주신 것이다. 게다가 지금도 비슷한 질문이 우리에게서 대답을 요구하고 있으니, 자고로 역사란 반복되기 마련인가! 과연 재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이 재물을 위해 존재하는가?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9월호, 김명숙 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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