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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의 세계: 사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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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9-25 조회수7,431 추천수1

 

[성경의 세계] 사울 이야기 (1)

 

 

사울은 이스라엘 첫 임금이다. 사무엘기 상권 9장에 기록이 등장한다. 벤야민 지파로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처럼 잘 생긴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1사무 9,2). 키도 컸다. 보통사람 어깨 위만큼 더 컸다. 꽃미남에 큰 신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그런 신체조건이면 대부분 군인의 길을 걸었다. 사울 역시 이스라엘 임금이 되지만 일생을 필리스티아인과 싸우면서 보내야 했다.

사울이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두 가지다.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질적인 두 사료가 함께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제비뽑기를 통한 등장이다(1사무 10,21). 두 번째는 아버지 명령으로 암나귀를 찾다가 사무엘을 만나는 내용이다. 제비뽑기로 왕이 되었다는 전승(傳承)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판관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12지파 연합체로 존속해오고 있었다. 이민족 침입에는 지파끼리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파는 독립된 부족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군대를 움직이는 왕의 선택은 모든 지파가 참여하는 조건이어야 했다. 제비뽑기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주관자는 사무엘이었다. 당시 판관이었고 예언자로 추앙받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후견인은 주님이셨다. 그런데 사울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벤야민지파 역시 주도세력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불평이 터졌다.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1사무 10,27) 당시의 불만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결국 이런 분위기가 유다지파 다윗을 다시 왕으로 선택케 했다. 사울이 사무엘과의 반목으로 왕위를 떠났다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봐야 한다.

왕이 된 사울은 지파들의 불만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야베스 길앗 주민들이 암몬족에 포위되어 항복할 처지가 된 것이다. 소식을 접한 사울은 군대를 소집해 암몬군을 무찔렀다. 주님의 영이 함께 하셨던 것이다. 야베스 주민들은 감격한다. 사울이 왕이 될 수 있겠냐고 했던 자들이 누굽니까? 죽여 버리겠습니다(1사무 11,12). 분위기는 사울 쪽으로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은 백성을 모아 길갈에서 사울을 왕으로 공식 선언한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넌 뒤 첫 할례를 행한 성지였다. 훗날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었을 때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준 이들은 야베스 길앗 주민들이었다(1사무 31,12). [2016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사울 이야기 (2)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평생 전쟁을 치르다 전쟁터에서 죽었다. 판관과 마찬가지로 그의 역할은 외부침략을 방어하는 데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지파별로 전투병을 뽑았고 모두 지원병이었다. 사울은 이들을 규합해 필리스티아인과 싸웠고 중앙의 산악지대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무엘은 다윗을 몰래 선택했고 임금으로 기름 부었다(1사무 16,13). 두 번째 왕으로 선언한 것이다. 물론 공적 선언은 아니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무엘기는 두 가지 전승(傳承)을 전한다.

 

첫째는 전쟁터에서 사울이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린 일이다(1사무 13,9). 사제였던 사무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사울은 번제물을 바치며 격려했던 것이다. 사무엘은 이 일로 사울의 왕위를 거론했다. 두 번째는 아말렉과 싸운 후 사무엘의 예언을 실행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말렉을 섬멸할 때 남자와 여자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모두 없애라는 것이었다(1사무 15,3). 그런데 사울은 제사의 번제물로 바치려고 좋은 양과 소를 남겨 두었던 것이다(1사무 15,21). 이후 사울과 사무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사무엘은 다윗을 만나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사울에겐 사무엘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파들의 지지를 위해선 그의 중재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퇴진을 압박하다 숨을 거둔다. 어수선한 시국을 틈타 필리스티아인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다. 상황은 어려웠다. 내분으로 힘은 분산되었고 결정타를 가할 군대는 없었다. 쇄도하는 적을 방치할 순 없는 일이었다. 사울은 길보아 산 위로 군대를 집결시키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필리스티아인은 사울의 시체를 확인하곤 벳산(Bethshan)요새 성벽에 달아 놨다. 야베스 길앗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냈다. 그들은 7일간 단식하며 슬퍼했다(1사무 31,13). 그만큼 사울의 죽음을 애석해했던 것이다.

 

사울은 다윗과의 관계에서 옹졸한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군사적 영웅이었다. 숱한 전투에서 뛰어난 역량을 드러냈고 부하들을 앞서가는 진정한 리더였다. 필리스티아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냈다. 서른 살에 임금이 되었고(1사무 13,1) 40년간 다스렸다(사도13,21). 사무엘기 상권은 사울의 죽음으로 끝난다. [2016년 10월 2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사울 이야기 (3)

 

 

사울이 등장할 당시 이스라엘은 12지파 연맹체였다. 율법과 계약으로 얽혀있었지만 공동의식은 약했다. 국가보다 지파가 앞선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제무기와 전차를 앞세운 필리스티아인은 줄기차게 공격해왔다. 왕을 앞세우며 국가 체제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사울은 평생을 전쟁에 시달렸고 전쟁터에서 죽었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 있는 길보아 산에서 전사한 것이다.

 

서른에 왕이 되고(1사무 13,1) 40년 다스렸으니(사도 13,21) 70세에 죽었다. 그의 세 아들도 함께 전사했다(1사무 31.6). 왕실 전체가 길보아 전투에 나섰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장남 요나탄은 왕위를 이을 왕자였다. 다윗을 없애려 혈안이 된 사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다윗과의 관계만으로 평가할 순 없는 일이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기록은 늘 승자 편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법. 사울이 국가조직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군주제 특성인 화려한 궁전도 없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왕이 되어 첫 거처로 삼았던 기브아(Gibeah)는 단순하고 촌스런 요새에 불과했다.

 

사울은 왕후 아히노임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1사무 14,49). 요나탄은 장남이며 막내가 미칼 공주다. 그녀는 다윗의 첫 부인이 되지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 못했다. 자식도 없었다. 미칼로 인해 요나탄과 다윗은 처남 매제가 되었다. 둘은 차세대 지도자였다. 한쪽은 왕이 될 신분이었고 다른 쪽은 왕권을 위협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가까이 지냈다. 요나탄은 뛰어난 용사였다. 사울이 필리스티아인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군 주둔지 미크마스를 선제공격해 무력화시켰다(1사무 13,23).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요나탄의 모습이다. 이후 군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요나탄이 죽자 다윗은 애절한 노래를 남겼고(2사무 1.17-27) 왕위에 오른 뒤에는 후손을 도와주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유대인들에게 전설적 교훈이 되었다.

 

사울의 어원은 히브리어 샤알(shaal)이다. 요구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의 동사가 원형이다. 사울을 희랍어로 옮긴 것이 바울로스(바오로)다. 사도 바오로의 원이름도 사울이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기에 로마식 이름도 함께 사용하였다. 그것이 바오로(바울)였다. 회개 후 개명한 이름이 바울이었다는 것은 바른 지식이 아니다. [2016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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