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유다인 바오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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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10-20 | 조회수5,158 | 추천수1 | |
[바오로 영성의 주제들] ‘유다인’ 바오로
“내가 내 민족들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이미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에디트슈타인(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에 피신을 제의받자 한 답변입니다. 유다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가르멜회 수녀로서 고통받는 동족 유다인들과 함께 가스실에서 죽은 성녀의 글을 읽으면서 ‘유다인’ 바오로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번 호에는 바오로 사도를 유다인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바오로 서간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어려운 구절들이 있습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이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주 예수님을 죽이고 예언자들도 죽였으며, 우리까지 박해하였습니다”(2,15). 바오로는 이어서 “마침내 그들에게 진노가 닥쳤습니다.”(2,16)라고 말합니다.
먼저 지적할 것은 바오로가 이 구절들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후대 저자가 그 구절들을 기록했는데 바오로 서간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바오로의 친서에 삽입되어 바오로의 관점을 대표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경 안에서 이 구절이 발견되고, 반유다적 태도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역사 안에서 이 대목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천 년 동안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유다인 바오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이방인에게 가라는 사명을 받은 뒤에도 자신의 유다인 특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믿으면서도 유다인으로 머물렀습니다. 때때로 자신의 유다 유산을 자랑스럽게 떠올리며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언급하기도 합니다(로마 11,1; 2코린 11,22; 필리 3,5-6 참조).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인간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가정에 속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바오로는 이 진리를 체험하고서는 유다인에게 필요한 ‘율법 준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한테는 불필요한 것으로, 율법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으로서 바오로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한 바리사이 바오로의 삶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받은 유다 교육과 전통, 하느님 경배의 삶과 기도생활 등은 그가 이방인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유다인들을 위한 헌금
바오로와 유다인의 관계는 선교활동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바오로는 46년께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바르나바와 함께 이방인 선교를 위임받았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두 사람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갈라 2,1-10 참조).
바오로는 그 뒤 십여 년간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 약속을 기억했고 여러 공동체에서 모금활동을 해왔습니다. 코린토 2서 8-9장에는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에 이 모금활동을 격려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 두 장은 바오로가 예루살렘 교회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기울인 온갖 노력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바오로는 이 모금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빚을 지고 있는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코린토 2서 8-9장에서 바오로가 말한 내용은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의 체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이 장을 공부하는데 그 전날 서울 시내 어느 본당에서 선교사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던 수녀님이 “이 본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금 신학을 담고 있네요.”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바오로가 꾸준히 모금활동을 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유다인들의 전통에 깊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공동체가 약자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삶의 방식을 살라고 계속 권고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자선은 의인의 기준이었습니다. 나아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오로의 모금활동에 더욱 깊은 동기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구약이나 바오로에 대한 강의나 나눔을 ‘이민족들의 사도’하면 이스라엘의 앞날에 대해 자주 질문합니다. 바오로의 삶과 인격, 그의 신학보다는 이 주제가 더 관심이 가나 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틀 안에서 이스라엘의 위치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은 복잡합니다. 바오로는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마침내 이스라엘이 이방인에 이어 구원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자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구원 안에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부한 예수님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인 것에 대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위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주도권으로 당신 계획을 수행할 사람들을 선택하셨는데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님 모두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데 대다수 유다인은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자신을(로마 11,13; 갈라 2,8)라고 여긴 바오로한테 무엇보다도 긴박한 문제였습니다. 로마서 9-11장에서 바오로는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오로는 선택된 백성이자 ‘약속의 자녀’(로마 9,8)라는 이스라엘의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을 통해 전해지는 유산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시지만 먼저 선택한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습니다(11,1 참조).
예언서에서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느님께 불충실했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10,21). 이스라엘 역사는 한마디로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편에서 자발적으로 실패한 것입니다(9,31-33).
그래서 바오로는 올리브 나무라는 영상을 빌려옵니다. 신앙의 역설로 이방 민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여 본디의 가지가 잘려나간 자리 위에 접붙여지게 됩니다(11,13-24). 이것은 이방 민족의 타고난 의로움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 때문에 그리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목적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11,14).
그들은 이방 민족이 구원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도 구원되기를 저절로 바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잘려나간 본디의 가지들도 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게 될 것입니다(11,19).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기를 바라시기에(10,12-15 참조) 유다인과 이방 민족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불순종했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로마 11,32).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을 보면서 그들이 왜 구원받았는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그들도 구원될 것입니다(11,26).
율법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며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받습니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신비’를 상기시키며 이를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시리라고 이미 약속하신 하느님께서는 늘 구원을 바라시며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한 논증을 마무리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대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찬미기도를 바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말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11,33) 바오로는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가 동족 이스라엘의 완고한 마음과 제사를 품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스라엘의 앞날을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하느님 백성의 슬픈 역사
바오로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바깥사람들보다 내 가족, 내 공동체에게서 느끼는 소외와 고립이 더 힘든 체험입니다. 바오로는 늘 어디서든지 유다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지만 유다인 대다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오로 일행의 이방인 선교를 방해까지 하며 괴롭혔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 소개된 바오로의 선교여행(13-28장)을 보면 바오로가 자의로 선교지를 옮기기보다는 유다인들에게 내쫓겨서 다른 도시로 떠난 적이 더 많습니다. 바오로는 여기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바오로는 동족의 이 박해를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겪은 슬픈 역사의 일부로 이해합니다. 바오로의 관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예언자적 인물들을 자주 거부했습니다(마태 5,11-12; 23,37 참조).
예수님께 일어난 불행한 역사는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을 괴롭힌 박해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고통을 복음의 근본요소로 해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의 낙인이 찍힌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하느님의 진노는 모든 이에게
바오로 서간에서 ‘하느님의 진노’ 개념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에 참여한 유다인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바오로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느님 뜻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내린다고 믿습니다(로마 13,4 참조).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친 유다인들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반복해서 죄를 지으며 완고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세례를 받고도 십자가의 지혜가 아닌 인간적인 지혜를 따라 살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 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대표이며, 대전가톨릭대학교 부설 혼인과 가정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0월호, 글 임숙희 · 그림 서소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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