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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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11-11 | 조회수6,779 | 추천수1 | |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는?
먼저 설교 주요 본문을 봅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서 살게 하겠다.’”(7,3-7)
실제 이스라엘인들의 삶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곧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다음 구절은 당시 이스라엘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7,8-9).
이스라엘은 부끄러움을 아예 모르는 듯, 그들의 철면피 같은 삶의 모습이 다음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7,10-11)
그렇다면 이스라엘 곧 유다민족이 새롭게 출발할 기회는?
물론 그들이 다시 일어설 기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들이 예언자의 선포를 받아들여 악행에서 돌아서면 언제든 유다민족은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는 계속됩니다. “주님의 집 뜰에 서서, 주님의 집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 ”(26,1-6) 예레미야 예언자의 성전설교는 곧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 구원의 신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지도층이 예언자의 설교를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유다지도층의 반응을 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끝나기가 무섭게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를 붙잡고 소리칩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26,8ㄴ-9)
예언자들 가운데 예레미야는?
누구보다도 고독한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가면서 우리는 한 예언자가 겪는 고독을 실감나게 느낍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뽑힐 적부터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1,6) 라고 거부하고 싶어 했지요. 그의 삶이 참으로 고독했음이 다음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저는 홀로 앉아있습니다.”(15,17) 자신이 얼마나 소외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사뭇 고독하게 살아가야 했음을 예언자는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되고 외면당합니다.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0) ‘사방에서 공포가!(마고르 미싸빕)’는 예레미야가 자주 부르짖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표현을 그대로 그의 별명으로 붙여줍니다.
그의 가족들조차도 그를 이해하기보다는 박해합니다. “……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 집안조차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구나……. ”(12,6) 결국 예레미야는 일가친척의 혼인이나 장례 때도 참여하여 집안사람들과 함께 기쁨이나 슬픔을 나눌 수조차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고, 곡하러 가지도 말고, 그들에게 조의를 표하지도 마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화를 거두고…… 너는 사람들과 앉아 먹고 마시려고 잔칫집에 들어가지 마라.’”(16,5-8)
그밖에 예레미야가 겪은 일은?
그는 숱한 고초를 겪습니다. 아버지가 되어 보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너는 이곳에서 아내를 얻지 말고 아들딸도 낳지 마라.’”(16,1-2) 옥에 갇히고 저수동굴에 갇히고 혹사당하며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생애를 마칩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우리 본당이나 기관에서 책임자나 봉사자들이 흔히 칭찬받습니까? 열심히 성의껏 최선을 다하고도 적잖은 경우 아주 사소한 일이나 옥에 티를 침소봉대하여 문제를 만들거나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이들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당이나 어느 단체에서 성실히 일하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희생하며 일하고 나서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잘했다는 칭찬 대신에 오히려 모든 일을 망쳐버린 것처럼 질책하거나 뒤에서 비난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희생하며 일을 훌륭히 해놓았는데도 뒤에서 비난의 소리가 들려온다면?
이럴 때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서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그의 마음과 처지를 파고 들어갈 때 적잖은 공감대를 느끼면서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이집트로 끌려간 예레미야가 어떻게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의 내적인 삶에 대하여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내적인 삶 곧 그의 영성에 대한 정보는 예레미야서 안에 즐비하게 나타납니다. 예레미야가 고독했던 이유는 그가 본디부터 내성적이거나 과묵한 성격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고립되다시피 한 채로 외롭고 소외된 가운데 살아갔습니까? 한마디로 하느님 말씀이 그를 그렇게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고독은 그 자신이 철저히 하느님 말씀에 부합하게 살았던 결과였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니 그 말씀이 우선은 그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15,16) 그럼에도 그분 말씀을 받아먹은 결과는 때때로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내 모든 뼈가 떨린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이는 주님 때문이요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23,9)
예레미야가 깨달은 바는?
수많은 불평을 늘어놓는 가운데 그는 깨닫고 확인합니다. 고난과 고독 자체가 예언직의 일부라는 사실을!(예레미야의 고백 참조: 11,18-20,18) 오늘 우리 봉사자들도 예레미야처럼 그런 깨달음을 조금 가질 수는 없을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1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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