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지도자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욥 | |||
---|---|---|---|---|
이전글 |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마른 뼈의 부활 |1| | |||
다음글 | 다음 글이 없습니다.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11-12 | 조회수5,852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지도자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욥
욥을 성경 속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욥기 서두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식구들을 잘 돌본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정치적인 역량을 보인 적이 없다. 세속적인 지도자의 풍모도 없고, 그저 잘 참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에 대한 겸손함과 믿음을 놓지 않는 우직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사람이 지도자라면 추종자들은 정말 답답해할 것이고, 불평불만만 하다 마침내 그 주변을 떠날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가라앉는 배의 선장임에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
욥은 고통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도, 그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때도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어떤 일을 했다고 떠벌리지 않는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려고 경청하는 태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자면, 문제를 풀려고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또 그런 분석을 통해 무언가 해결하려고 행동으로 옮기는 힘센 지도자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과연 좋은 지도자가 자신의 신념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데는 선뜻 동의하고 싶지 않다.
좋은 지도자는 자신의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경청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욥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높이는 지도자
욥기의 서두에는 욥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욥이 살았던 시기에는 흠 없는 인물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유다인들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치 공자가 요순 임금을 흠 없는 완벽한 성왕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뼛속 깊이 선하기만 하고, 모든 악행은 사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해 보인다. 악행을 저질러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상한 사람보다는 이기적 사람만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욥이 아무 잘못 없이 큰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어쩌면 이해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누린 욥이 오로지 하느님과 사탄의 거래 때문에 추락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을 거야! 그러니 벌받은 거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욥이 올곧은 사람이라고 못을 박는다. 욥의 고통이 그의 악행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원인을 따져보려는 과학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다.
성경에서 욥은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하느님과 사탄과의 내기의 희생양이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서 매정하시다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찌하여 저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 제가 죽어버렸다면 어떤 눈도 저를 보지 못했을 것을! … 저를 내버려두십시오. 이제 살날이 조금밖에 없지 않습니까?”(욥 10,18.20)
그럼에도 욥과 같은 상황에서 ‘하느님,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묻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인격화로 포장된 신의 모습이 그나마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 같기 때문이다.
어른이 어른답게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지도자가 지도자답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좋은 지도자는 추종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공적을 남기려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과 공동체를 높이는 이들일 것이다.
이 시대의 큰 지도자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가난한 이들이 고해소로 찾아오면 돈을 주시는 행동까지 하시면서 주변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자신을 준비된 지도자라고 자신하지만, 막상 권력을 잡고 나면 파괴적인 지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본인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권력을 잡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호통치거나 자기 생각만을 강요한다.
고통 속에 있는 이를 품는 지도자
진정한 지도력은 파괴적인 힘의 과시가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품에 안을 때 드러난다. 성경에 등장하는 훌륭한 지도자들도 다양한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큰 지도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욥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이란 고통을 다 겪고 나락으로 급격히 추락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난다.
욥기의 서두에 등장하는 욥은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신앙, 올바른 행동을 하는 정의로운 부자이지만, 거기까지에서 멈춘다면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논리에 빠져 산다면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단순히 믿게 된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실패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믿는 삶의 원칙은 굳이 영성과 종교의 영역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속적인 눈으로 보자면 부조리한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드는 힘이다. 인간은 운명의 소용돌이가 끝난 다음에야 한 부분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진정으로 운명의 소용돌이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지, 또 어떤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 예측하지 못한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공감하는 지도자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라도 욥과 같은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리한 대중은 그런 한계를 뛰어 넘는 초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실수를 잘 아는 겸손한 지도자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은 고통과 좌절의 경험인 것이다. 욥 또한 비극적인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단순히 올곧은 지도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공감하는 지도자로 거듭났을 것이다.
요즘은 지도자의 고생담은 대중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과장된 표현이 많거나 자신들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나가야 할 많은 젊은이가 모든 절망의 순간을 잘 이겨내도록 이끌어줄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 같다.
착한 사람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불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거나 악한 사람들이 부와 권력의 높은 의자에서 호령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냉소와 허무주의에 빠진다.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 욥은 이런 마음을 추슬러 올곧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우리에게 채찍질하는 것은 아닐까?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을 정작 놓치고 마는 현대인에게 욥과 같은 지도자는 정말로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 이나미 리드비나 - 심리분석 연구원. 한국 융 연구원 지도 분석가이며 서울대학교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서를 심리적으로 풀어본 슬픔이 멈추는 시간」, 「성경에서 사람을 만나다」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1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