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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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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2 조회수7,227 추천수1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1)

 

 

사무엘은 사울이 살아 있을 때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공인했다. 현직 왕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새판을 짜고 싶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사울 이전의 판관이었다. 그런데 민중의 성화에 밀려 왕을 뽑고 자리를 내줬다. 당연히 왕을 자신의 권위 아래 두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자 노선을 굳힌다. 전투 중에는 사기 진작을 위해 번제물을 바치기도 했다(1사무 13,9). 제관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이다. 사울은 호된 질책을 듣는다. 이후 사무엘은 새 임금을 물색했다. 다윗의 선택이다. 당연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주님께 의지하는 신앙인으로 바뀌어 간다.

 

다윗이 성경 무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는 사무엘이 베들레헴 족장 이사이를 찾아가 막내아들 다윗에게 기름 붓는 장면이다(1사무 16,13). 이사이도 다윗도 사무엘의 방문을 전혀 예측 못 했다. 이 일이 있기 전 사울은 사무엘의 질책과 함께 왕위가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1사무 15,23). 아말렉 전투에서 헤렘(herem)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헤렘은 없앤다는 뜻의 히브리말이다. 전쟁 노획물에서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고 태울 수 있는 것은 전부 태우고 보물은 성소의 금고에 보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임금을 죽이지 않았고 몇몇 짐승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1사무 15,9).

 

두 번째는 다윗이 비파 연주자로 발탁되었다는 기록이다(1사무 16,19). 악령에 시달리던 사울을 위한 조치였다. 당시 음악은 오락을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다. 주술적 힘이 그 안에 있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래서 다윗이 선택된 것이다. 사울은 불면증이나 신경쇠약 때문에 힘들어 했던 것은 아니다. 원인은 악한 영이었다(1사무 16,14). 다윗의 임무는 비파를 타며 악령을 쫓아내는 주술사 역할이었다.

 

고대 중동에는 많은 주술사들이 교육을 통해 배출되었다. 비파 연주는 주술의 일종이었던 셈이다. 다윗도 비파 연주와 함께 악령 쫓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비파 실력만으론 궁중에 불려갔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언제 어디에서 왜 비파 타는 주술을 익혔을까? 성경에는 답이 없다. 아무튼 다윗 출현의 두 번째 배경은 비파 연주였다. 감미로운 음악 연주가 아니라 악령을 쫓는 주술의 연주였다.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2)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세 편이다. 사무엘이 베들레헴 족장 이사이 집을 방문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 악령에 시달리던 사울을 위해 비파 연주자로 발탁된 일. 세 번째는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다(1사무 17장). 이렇듯 다윗의 첫 출현은 내용이 서로 다르다. 그만큼 유명했고 전승이 많았다는 증거다. 훗날 그는 지파들을 규합해 통일왕국을 이룬다. 당시 지파들은 따로 놀았다. 제사도 따로 지냈고 주님을 부르는 호칭도 달랐다. 야훼라 했고 엘이라 부른 지파도 있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일치시킨 것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기록은 넘쳐났고 꾸며낸 이야기도 많았다. 바빌론 유배 후 성경의 틀이 형성되면서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골리앗은 필리스티아 군인으로 이스라엘과 전투 중 등장한다. 키가 엄청 크다. 여섯 암마 한 뼘이다(1사무 17,4). 암마(ammah)는 중지(中指)에서 팔꿈치까지 길이로 대략 45cm다. 6암마 한 뼘이라면 3m 가깝다. 과장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엔 규빗(cubit)이라 했다.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새 번역에선 히브리어 암마를 그대로 사용했다. 골리앗 차림새도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투구와 비늘갑옷은 다윗시대 이후 등장한다는 것이다. 과장된 키와 차림새를 삽입시킨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장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골리앗은 외쳤다. 너희 중 한 명을 보내라. 나를 이기면 우리가 종이 되겠다. 내가 이기면 너희가 우리 종이 되어야 한다(1사무 17,8). 일대일 대결에서 이기는 쪽이 승리한 것으로 하자는 얘기다. 다윗은 무릿매와 돌멩이 한 개로 중무장한 골리앗을 쓰러뜨린다. 한 방에 끝낸 것이다. 그리곤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고 한다(1사무 17,54).

 

골리앗의 죽음은 다윗의 첫 등장을 알리는 세 번째 이야기다. 주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메시지다.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무릿매 실력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다윗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무릿매는 순수 우리말이다. 줄팔매라고도 한다. 줄 가운데 가죽이나 천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돌을 넣고 돌리면서 던지는 기구다. 고대부터 단순하고 강력한 원거리 무기(投石機)였다. 영어는 슬링(Sling)이다. 돌팔매와는 다르다. 돌팔매는 무언가를 맞추기 위해 손으로 던지는 돌을 말한다.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3)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전 비파 연주자로 궁중에 들어갔다. 사울은 그를 무기병으로 삼았다(1사무 16,22).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타나자 저 젊은이가 누구 아들인지 묻는다(1사무 17,55). 앞장에선 무기병으로 삼았는데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전승이 나란히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골리앗 사건 이후 다윗은 사울 곁에 머문다. 군대를 통솔했고 싸우는 전투마다 승리했다고 성경은 전한다(1사무 18,7). 사울은 수천을 치고 다윗은 수만을 쳤다네. 당시 여인들이 불렀다는 노래다. 민심이 다윗에게 기울어 있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사울에게 밉보이고 피신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무작정 떠돌아다닌 건 아니었다. 세력을 키웠다. 곤경에 빠지고 빚진 자들 그리고 불만에 찬 이들을 모았는데 400명이 넘었다고 한다(1사무 22,2). 이들은 다윗을 추종했고 숫자는 늘어갔다. 이들이 있었기에 인색했던 부자 나발을 없애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1사무 25장). 쫓기던 다윗은 마침내 필리스티아로 피신한다. 갓 임금 아키스에게 간 것이다(1사무 21,11). 갓(Gath)은 필리스티아 도시국가로 유다 땅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다윗은 부하 600명과 함께 아키스의 용병으로 1년 4개월을 살게 된다(1사무 27,7).

사울이 죽자 다윗은 필리스티아를 떠나 헤브론으로 이주한다. 600명 부하와 식솔들이 운집한 것이다(2사무 2,3). 헤브론은 유다의 땅 중앙산지에 있었고 성스런 곳이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로 여긴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과 레아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창세 49,31). 막강한 곳을 다윗은 선택했던 것이다. 600명과 식솔이라면 아이를 포함해 2,000명이 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헤브론 유지들이 찾아와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선언한다(2사무 2,4). 헤브론은 수도가 되었다. 훗날 다윗 아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헤브론을 근거지로 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예루살렘 남쪽 30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930m 도시다.

유다의 유지들이 다윗을 왕으로 택한 것은 필리스티아인 때문이다. 그들은 기원전 12세기 가나안에 정착했고 이스라엘과 부딪쳤다. 당시 12지파는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독립된 공동체로 나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죽은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유다 공동체는 같은 지파 출신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선 사령관 아브네르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2사무 2,9). [2016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교리 주간)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4)



다윗은 헤브론에서 임금이 되지만 유다의 왕이었다. 이스라엘 왕은 사울의 넷째아들 이스보셋이었다(2사무 2,9). 유다와 이스라엘은 민족의 뿌리는 같았지만 개별국가로 존재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왕이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진다. 기원전 931년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두 국가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다윗 이전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다. 이후 남북왕조는 통합되지 않고 200년 이상 대치하다 북이스라엘이 먼저 망했다(기원전 722년). 하지만 남쪽 유다는 동족이 사라졌다기보다 이웃 국가가 없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만큼 남남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해 사막을 떠돌 때는 함께 살았다. 12지파는 장막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였다. 하지만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달라진다. 땅 분배로 흩어졌고 그런 상태로 200년 넘게 살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1000년까지로 성경의 판관 시대다. 당시 남부지역은 유다 지파가 장악했다. 이곳엔 성지 헤브론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묘가 있는 도시다. 여호수아는 헤브론을 유다 지파 칼렙에게 주었고(여호 14.13). 남쪽 땅 대부분을 유다 지파에 분배했던 것이다. 강력한 단일 공동체의 등장이었다. 훗날 벤야민 지파 일부도 유다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여호수아의 에프라임 지파는 중부지역에 살았다. 남과 북이 연결되는 훗날의 사마리아다. 이곳에도 베텔 성지가 있었다. 야곱이 주님을 만났던 장소다(창세 29,19). 에프라임 지파를 축으로 북쪽이 연대한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다. 이후 12지파는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200년을 독자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지파들을 다시 뭉치게 한 것은 필리스티아인의 침략이었다. 한시적 권한을 가진 판관으로는 대응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강력 대응을 위해 왕정이 요구되었고 이스라엘이 먼저 사울을 왕으로 뽑았다. 그리고 사울은 평생을 필리스티아인과 싸우다 전쟁터에서 죽었다. 유다 공동체에서 처음 선택한 왕은 다윗이었다(2사무 2,4).

임금이 된 다윗은 북쪽을 통합하려 했다. 그래서 수도를 신도시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새로운 성전을 구상했다. 전례와 제사의 일치가 지파의 일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중대한 이유다(2사무 6장). 다윗은 구약성경에 800번 이상 등장한다. 그만큼 유대인 심층 깊숙이 뿌리내린 인물이다. 족보로는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 [2016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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