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다라쉬, 공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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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12-04 | 조회수7,051 | 추천수1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다라쉬, 공부하다 하느님 뜻을 알기 위해 묻고 또 묻다
다라쉬는 '공부하다'를 의미한다.
- 다라쉬. 공부하다를 뜻하는 동사의 원형이다.
묻다
본디 다라쉬는 ‘묻다’를 뜻했다. 그저 ‘질문하다’가 아니라,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다. 정치·종교적으로 반대편을 색출하다는 뉘앙스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를 두 가지만 보자.
신명기 13장은 우상숭배를 물리치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혹시라도 불량한 사람들이 “다른 신을 섬기러 가자”라고 꾀면, 그런 사람은 “다라쉬하고(탐문하고) 조사하고 심문해 보아야 한다”(신명 13,15). 누가 감히 권력과 풍요의 우상을 하느님 백성에 들여왔는지, 그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라는 것이다.
한편 바알숭배자들이 다라쉬한 기록도 있다. 판관 기드온은 바알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목상을 잘라버리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실천하였다. 그러자 바알숭배자들이 “누가 이런 짓을 하였나?”라며 범인을 찾기 위해 다라쉬하였다(“조사하고” 판관 6,29). 그들은 기드온을 죽이려 하였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하느님 백성의 다수가 바알에 빠져 참된 신앙인을 박해하니 말이다. 이 상황에서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기가 막혀 묻는다. “그대들은 바알을 옹호하는 거요?”(판관 6,31) 기드온 이야기는 하느님 백성이라도 스스로의 인간적 나약함을 깊이 깨닫고, 권력과 물신의 유혹에 맞서 늘 깨어 있어야 함을 일깨운다.
- 다라쉬티. 다라쉬의 1인칭 완료형으로, “(주님을) 나는 찾네”(시편 77,3)란 뜻이다. 달레트(d) 안의 하늘색 점은 일부 자음(bgdkpt)으로 음절이 시작할 때만 쓰이는 것으로(약한 다게쉬), 이 경우 d를 겹쳐 쓰지 않는다.
주님께 묻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 다라쉬한다’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하느님께 적극적으로 묻고 또 묻는 것이다.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는 쌍둥이를 임신하였다. 에사우와 야곱은 각자 다른 민족의 조상이 된다. 그런데 쌍둥이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기들이 속에서 서로 부딪쳐 대자, 레베카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주님께 다라쉬하러(“문의하러”) 갔다(창세 25,22). 레베카는 어미의 예감으로 쌍둥이의 운명을 두고 주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떠돌던 백성은 모세에게 찾아가 모든 문제를 물어보았다. 모세의 장인 이트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가 백성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왜 이렇게 힘들게 일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백성이 하느님께 다라쉬하려고(“문의하려고”) 저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탈출 18,13-15). 광야의 백성은 모세를 찾아와 과연 하느님이 어디로 이끄실지, 자신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백성들 사이의 문제는 어찌 해결할지 등을 묻고 또 물었던 것 같다.
시편 저자는 주님께 다라쉬하는 일을 찬미한다. 사람은 무릇 곤경의 날에도 주님께 다라쉬해야 한다(“찾네” 시편 77,3). 아무리 세상이 어렵더라도, “주님을 다라쉬하는(“찾는”) 이들에게는 좋은 것 하나도 모자라지 않으리라”(시편 34,11)고 노래한다.
- 미드라쉬. 다라쉬의 명사형으로 ‘공부’, ‘해석’, ‘이론’ 등 다양하게 옮길 수 있다. 하늘색 윗첨자e는 발음되지 않지만 초보자를 위해서 표기한 것이다(무성셰와).
미드라쉬
미드라쉬는 다라쉬의 명사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공부’, ‘탐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첫째가는 공부는 당연히 성경 공부였으므로, 이 말은 ‘(성경) 해석’, ‘(성경탐구의) 이론’이란 뜻도 있다. 고대 유다교 라삐들의 성경해석을 집대성한 책의 이름도 미드라쉬다. 미드라쉬를 펼쳐 보면, 성경의 한 구절이나 한 단어를 놓고 묻고 또 물었던 라삐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이나 유다인이나 모두 교육열이 높다. 그런데 공부의 전통은 조금 다른 듯하다. 우리말 ‘학습’(學習)은 ‘어린 새가 나는 법을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다. ‘배울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 반면 다라쉬는 그저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기존의 방법을 따라 하는 것은 다라쉬가 아니다. 선생과 학생이 서로 묻고 대답하고 또 묻고 대답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것이 다라쉬다. 이를테면 다라쉬는 철저한 ‘자기주도학습’인 셈이다. 혼탁한 세상에 구세주께서 오신 뜻을 묻고 또 물으며 대림 시기를 보낸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2월 4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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