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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여행28: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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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2-19 조회수6,449 추천수1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8)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은 바로 예수님

 

 

요한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1-12장은 표징의 책으로, 13-21장은 영광의 책으로 부릅니다. 복음서의 첫 부분을 표징의 책이라 칭하는 것은 그 안에 일곱 개의 표징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달리 ‘기적’이라는 표현 대신 ‘표징’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적이나 표징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표징은 사건의 놀라움보다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기적은 예수님의 신원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이 표징들은 2장에서 12장 안에,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시기 전에 일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리신 이야기는 요한 복음이 전하는 마지막 표징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요한의 독자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라자로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결과를 11장 전체에 걸쳐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에 살던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던 이들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라고 기록합니다. 또 라자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셨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라자로의 죽음과 그의 자매들과 예수님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요한은 라자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 베타니아에서의 이야기는 마르타와 마리아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자매 모두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32). 이 표현을 통해 두 자매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으로 여겨졌습니다. 마르타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 날에 일어날 모든 이의 부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이것이 죽은 라자로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동굴로 된 무덤 앞의 돌을 치우게 하고 라자로를 부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를 되살린 이야기는 이 소식을 들은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하고, 더 나아가 라자로 역시 죽이기로 마음 먹습니다(12,10).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과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다인들과 첫 갈등은 성전 정화입니다(2,13-22). 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갈등은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점차 고조됩니다(5장, 9장). 그리고 그 최고조에 이르는 것은 바로 라자로를 되살리신 사건이었습니다. 공관 복음보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사건들이 좀더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한 번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갈등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자로를 되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라자로를 통해 그 말씀은 실현됩니다.

 

더 나아가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동굴 무덤에 묻힌 라자로와 그의 무덤 앞에 놓여 있던 돌을 치우는 것은 분명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케 합니다. 라자로를 되살린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을 넘어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에 라자로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예시하는 표징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8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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