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공정과 정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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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6-12-20 | 조회수6,970 | 추천수1 | |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 공정과 정의
지하철을 타거나 거리를 다니다 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가끔 만난다. 그럴 때마다 흑백논리로 성경을 왜곡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를 듣고 성경에 반감을 품게 될 사람들 생각 때문이다. 마태 25,31-46이 전하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그 구호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가 나타난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말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 온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참정의가 실현되는 때를 뜻한다. 심판의 기준이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는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옛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공정과 정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이사 1,10-17; 아모 5,21-24 등 참조).
예수님께서도 초주검이 된 길손을 모른 척한 정통 유다인보다 비주류이지만 길손을 구해주고 보살핀 사마리아인을 더 높이 평가하셨다(루카 10,29-37). 곧, 신구약에서 모두 형식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되뇌는 이보다, 그분을 잘 모르더라도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 이가 하느님의 눈에 더 의롭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말하는 공정과 정의는 무엇이고 최후의 심판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의무
공정과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같다. 바로 공동선이다. 공정과 정의는 언뜻 추상적이고 형용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만, 구약성경에는 아주 간단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지 않는 것, 특히 수탈당하기 쉬운 약자를 착취하지 않는 것이다(예레 22,3; 에제 18,5.7-8 등 참조). 굳이 성경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참다운 정의는 거기서 시작하지 않는가. 특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므로 생태계 전체에 공정과 정의를 행할 의무가 있다.
창세 2,7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신 사람은 아담이었다. 흙으로 그를 빚으신 다음, 당신의 숨을 넣어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피조물들 가운데 아담에게만 숨을 직접 불어넣으신 것은 그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시다. 창세기 1장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다(26-27절). 게다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축복도 받으므로(28절), 아담이 임금의 직분으로 세워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창세 2,7은 아담이 한낱 흙에서 나왔음을 밝혀 겸손을 배우게 한다. 시편 104편은 인간을 대자연의 일부로 묘사하여(15.23절 참조), 조화로운 공존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곧, 아담은 피조물들 세상에서 임금과 같지만,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공정과 정의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의무도 다해야 한다). 수탈당하기 쉬운 약자는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주님께서 창조하신 생태계를 착취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
임금의 의무
공정과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팟 우츠다카’라 한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관습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근동 전체에 존재했다. 한때 고대 근동의 국제 언어였던 아카드어로는 ‘키툼 우 미샤룸(kittum u mi?arum)’이라 했으며, 임금이 행해야 할 덕목으로 여겼다(1열왕 10,9 :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참조).
임금들은 대개 즉위하는 해에 ‘키툼 우 미샤룸’을 선포하여, 가난한 이들의 빚을 탕감하고 억울하게 갇히거나 종이 된 백성을 풀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선왕의 재위 동안 뒤틀린 걸 바로잡아 사회균형을 유지하고 백성의 환심도 샀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의 함무라비 임금은 신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앉혀 나라에 공정을 세우려 했다고 선포했다. 다윗도 즉위하면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했다(2사무 8,15 :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모든 백성에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였다.” 참조). 「성경」에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며’로 의역되었지만, 직역하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 임금으로 즉위했을 때’로도 옮길 수 있다.
이스라엘 임금들이 타락하여 제 이익만 밝히게 된 경우에는 예언자들이 나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며 약자들을 구하라고 부르짖었다(예레 22,2-3 : “유다 임금아, 이 성문으로 들어오는 네 신하들과 백성과 더불어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고 착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참조).
그렇지 않으면 민심이 이반하여 공동체 의식이 깨지고, 결국에는 주변 강국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이 지파 간 평등을 유지할 때, 순조롭게 지속될 수 있다. 실제로 유다 왕국은 불공정과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다 멸망을 맞게 되므로, 예언자들은 훗날 다윗 후손이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확립하게 되리라고 예고한다(이사 16,5; 예레 23,5; 33,15 등).
성문 앞에서 행한 공정과 정의
일상생활에서 임금이 공정과 정의를 행한 곳은 성문 앞이었다. 거기에 앉아 백성을 위해 재판을 해주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임금이 성문에 좌정했다는 말이 종종 나온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한 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전에 마하나임 성문 앞에 좌정했다(2사무 19,9). 압살롬은 반역하기 전 예루살렘 성문 앞을 어슬렁거리며, 재판하려고 찾아오는 백성을 볼 때마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마음을 샀다(2사무 15,2-4).
마을 원로들도 성문 앞에 앉곤 했다. 원로들은 경험이 많고 연륜이 깊어, 현인으로 존경받던 이들이다. 그래서 조언자 역할을 주로 맡았고(1열왕 12,6 참조), 백성 사이에 일어나는 송사도 해결해 주었다(곤란한 일이 발생했을 때 성읍 원로들에게 재판을 청하도록 규정한 신명 22,13-19 참조).
보아즈는 베들레헴 성문으로 올라가 원로들을 앉게 한 다음(룻 4,1-2), 룻과의 혼인문제를 해결했다. 실수로 살인한 자가 도피 성읍으로 피신하려 할 때도 그 성읍의 성문 어귀에서 원로들에게 사정을 먼저 설명해야 했다(여호 20,3-4). 성문 앞에서 재판한 것은, 군중이 모일 만한 공터가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옛 이스라엘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성읍을 요새처럼 만들고 그 안에 거주했다.
따라서 성안은 거주지로 조밀하므로 빈 공간이 없었다. 잠언에는 하느님의 지혜가 슬기로운 여인으로 현현하여 성문 어귀에서 백성을 훈계하고 가르친다(1,20-23; 8,1-11).
세상의 심판자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므로, 삼라만상의 조화를 해치는 악을 심판하심으로써(시편 94,2-4.23 참조) 세상을 다스리신다. ‘심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팟’은 ‘다스리다’라는 어감을 포함하는 말이다(시편 9,9 : “그분께서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고, 겨레들을 올바로 다스리시네.” 참조). 왕정이 없던 시절 이스라엘 지도자를 판관이라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성경 시대에는 정치 지도자가 재판관 역할도 맡았다. 이스라엘 판관은 세상의 심판자이신 주님의 본을 받아 백성을 이끌어야 했다(탈출 18,21-22; 신명 1,15-17 참조). 백성을 부당하게 핍박하는 외세가 있으면 심판하고(판관 2,18; 11,27 참조), 백성 사이의 분쟁도 해결해 주어야 했다(판관 4,4-5). 만일 백성이 판관에게서 공정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하느님께 호소할 수 있었다(탈출 22,22.26 등 참조). 특히 하느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같은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는데(시편 113,5-9; 146,7-10 등 참조), 상속재산을 수탈당하기 가장 쉬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열두 지파의 연대감이 강했고 빈부격차도 없었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층이 출현한 다음부터 백성 수탈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1사무 8,14-18; 이사 5,8; 미카 2,2.9 등 참조). 그 결과 만들어진 계층이 빈민이다. 평등사회는 한번 와해되면, 예전으로 회복하기 매우 어렵다. 공정과 정의는 정당한 몫을 빼앗긴 이들이 되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최후의 심판은 부당하게 착취당한 자들을 구하는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시편 76,10; 마태 25,31-46 참조).
백성의 의무
공정과 정의는 본디 임금에게 요구되던 덕목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점차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율법으로 발전하게 된다(에제 18,21 :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참조). 사실 빈민을 구제하고 억울한 송사를 해결하여 공정을 세우는 일은 재력가나 권력자들에게 더 가능하다.
그렇지만 달리 말하면, 누구라도 재력이나 권력을 거머쥐게 될 경우 사회의 공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독려를 담았다. 곧, 요즘 말로 하면 공정과 정의를 율법으로 세워, 이스라엘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의무화하려 한 셈이다. 프랑스 말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와 권력, 명성을 가진 사람은 사회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뜻으로,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미덕과 도덕성을 의미한다.
세상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물이 끓으면 양이 줄어드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만큼 기화되어 구름이 되었다가 빗물로 되돌아온다. 곧, 형태는 바뀌어도 양은 변함없듯, 세상 물질은 늘 같은 양을 유지한다는 법칙이다. 재화도 그러하다. 내가 너무 많이 차지하면, 다른 누군가의 몫은 반드시 줄게 되어 있다.
그러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물론 계획 없이 몽땅 나눠주고 빈곤에 빠지는 것은 현명하지 않지만, 혼자 움켜쥐고 베풀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의 문을 스스로 닫아거는 행위와 같다. 최후의 심판 말씀은 바로 이 원리를 가르쳐주려 했을 것이다.
* 지난해에는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를, 올해에는 ‘자비의 해에 읽는 구약성경’을 집필해 주신 김명숙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2월호, 글 · 사진 김명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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