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말씀 단상: 철부지 손에 들린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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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1-18 | 조회수5,854 | 추천수1 | |
[말씀 단상] 철부지 손에 들린 성경
성경은 어렵다고들 합니다. 신부님께 묻고, 수녀님께 묻고, 그러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고픈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저로서도 성경이 어렵게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빛〉잡지로부터 성경에 대한 글을 부탁받은 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어려운 성경을 어떻게 쉽게 전달해 드리지?” 어렵게 여겨지는 성경을 쉽게 전하는 몫은 순전히 제 것이라고 여기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성경 속 한 구절에 한참이나 멍하니 머물렀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성경이 어렵다고 생각한 것도,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겠다는 저의 무모함도 이 성경 구절 덕택에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계시 헌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12항) 성경이 어려운 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고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사상 역시 너무나 달라 배우고 익혀서 그 차이와 다름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노력이 성경읽기에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철부지’의 자리를 포기할 수만도 없습니다. 글을 깨치지 못한 두서너 살의 어린아이들에게 우린 어떻게 말을 할까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 내며 어떻게든 교감하고자 애를 씁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지요. 마흔 가지나 넘는 일상의 이야기들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려 무던히도 애를 쓰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군중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고(마르 8,17; 마태 23,37), 심지어 울기까지 하셨습니다.(요한 11,33) ‘철부지’의 자리는 지식의 상아탑을 쌓을 것도, 지혜의 심오한 깨달음을 득할 것도 없는 그저 애를 쓰고 있는 ‘어른’의 사랑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전적인 의탁이 중요한 자리입니다.
‘철부지’가 되는 데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회개’가 필요합니다. 흔히 회개하라고 하면, 제 잘못을 씻고 뉘우치는 일을 먼저 떠올립니다. ‘회개’를 가리키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μετνοια)’에는 ‘돌아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처지가 어떻든 내 몰골이 어떻든 오시는 ‘님’을 향해 돌아서는 결단이 회개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하느님 말씀이 글로 옮겨진 이유는 지난 삶에 대한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바빌론 유배(BC 587-537) 후 다시금 하느님 백성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유다의 삶을 재정비하는 가운데 율법서인 모세오경이 쓰였고, 시대의 정의를 부르짖었던 예언자들의 글이 다듬어졌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질된 유다의 삶을 반성한 역사서들도 빼놓을 수 없는 회개의 증거였고, 이웃 문화 속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다시 해석하고 다시 깨우치고자 노력한 지혜문학의 집필도 회개의 결과였습니다. 지난 시절에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삶을 뉘우치고 새 삶으로 옮기고픈 유다 백성의 원의가 구약 성경 곳곳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것이지요.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증인들로부터 시작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보다 온전히 살아 내고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게 신약성경입니다. 깨어 있어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이끈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 예수님의 삶과 행적을 고스란히 전해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살아갈 삶의 지침을 제시한 복음서들, 그리고 공동체의 삶과 이상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다듬어간 가톨릭 서간들 모두가 예수님께로 향한 신앙인들의 회개며 갈망이었습니다.
요한묵시록 2장에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2,5) 일상을 살다보면 지향하고픈 삶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일을 허다하게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의 일, 처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했던 그 일들을 다시 정리하고 간추려 예수님을 향한 일을 다시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유다 백성이, 그리스도인들이 제 삶의 이 곳저곳을 정리하고 간추려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신앙의 정도를 보여줍니다. 다시 하느님을 찾는 이 길을 우린 회개라고 하며, 회개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기 반성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제 삶의 회복입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성경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건, 다시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철부지’로서 일 년 동안 성경 안에 등장하는 몇 가지 주제들을 찬찬히 살펴볼 참입니다. 기초적인 성경의 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지식들이 첨가되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에 적힌 글을 꼼꼼하게 읽어 가며 신자분들과 함께 성경 주제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누어볼까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볼 참입니다. 배웠다고 가르치려든 교만을 내려놓고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성경의 글자 하나 하나를 붙들고 사유하고 묵상한 제 단상을 이 지면에 옮겨볼까 합니다.
제 단상의 시작은 엉뚱한, 너무나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부활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라면, 왜 예수님은 바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나?’, ‘왜 예수님은 고단한 지상 삶을 사신 후에야 비로소 부활을 마지막에 보여주셨나?’ 이 질문은 ‘왜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그렇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나?’로 다시 고쳐질 수 있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사랑, 용서, 정의, 구원, 그리고 부활 등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며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까 합니다. 철부지로서 회개의 길에 함께하실 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 이번 호부터 연재를 맡은 박병규 신부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교수로 있습니다.
[월간빛, 2017년 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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