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나자렛 청년 요셉과 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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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2-18 | 조회수5,820 | 추천수2 | |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나자렛 청년 요셉과 꿈
요셉과 마리아의 스텝이 엉긴 탱고
‘여인의 향기’란 영화에서 퇴역 장교 프랭크는 이렇게 말한다. “스텝이 엉겨야 그게 바로 탱고지!” 나자렛 청년 요셉은 결혼도 하기 전에 스텝이 엉겼다. 참으로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약혼자 마리아가 자신이 아닌 ‘그 누구’의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유다 전승에서 혼인은 두 단계로 행하는 것이 상례였다. 1단계는 배우자 간 결혼 동의를 증인 앞에서 행하는 정혼이다. 이 단계에서 성적 결합은 하지 않고 각자 집에서 지낸다. 그다음 단계는 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예식으로, 정혼한 지 일 년 뒤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려고 신부가 신랑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서술하는 상황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요셉이 마리아의 소식을 들은 시점은 혼인의 1단계 상황이다.
사실 자신이 요셉 같은 상황이라면 이 세상 어느 누가 선뜻 약혼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황당하고 결혼을 약속한 것에 대한 배신의 가슴 아픈 시간에도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요셉의 태도이다(1,19). 요셉의 고민 이야기의 가장 깊은 인상은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표현한 대로 ‘의로운’ 요셉의 행동과 마리아에 대한 묵직한 사랑이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그가 마리아와 파혼을 결심했을 때 꿈을 꾸었다. 현대는 프로이트와 융의 연구를 통해 진정한 자기(self)를 찾아가는 여정의 목적으로 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융은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있다.”고 했다. 또한, 욥도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자리 위에서 잠들었을 때, 꿈과 밤의 환상 속에서,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욥 33,15-16)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는 꿈과 환상 둘 다 영적 권위를 지닌다(민수 12,6 참조).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이방인 임금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가 놓인 현재 상황을 알려주셨고 꿈을 꾼 뒤 아비멜렉은 그가 놓인 상황을 바꾼다(창세 20,3-7 참조).
예나 지금이나 꿈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자주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의미로 알아듣기도 한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갖춘 아이 코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썸니아(Somnia)’가 있다. ‘Somnia’는 라틴어로 ‘꿈을 꾸다’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 꿈의 사건과 현실은 같은 차원에 있다.
공감하기엔 조금 쉽지 않지만 꿈이 인간에게 미치는 신비적인 어떤 차원은 계속해서 매력이 있다. 요셉도 마리아가 말하지 않은 진실에 대한 내용을 꿈에서 천사로부터 속 시원히 듣게 되고 사실적으로 알아들었다.
꿈은 요셉에게 ‘마리아와 아기’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가진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고, 이제 그는 ‘그 아기의 양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여기서 그동안 요셉의 고민이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와 예수의 메시아성’이 하느님에게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신뢰에 대한 배신의 힘든 고통은 그날 밤 꿈을 꾼 뒤 진정한 사랑의 신뢰로 확인되었고, 새로운 세상의 창조가 시작되었다.
유다의 별
해마다 크리스마스의 구유에는 피부색이 다른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놓인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의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박사들이란 그리스어로 ‘마고이’라고 한다. 성서학자 델링(G. Delling)에 따르면, 이 말은 페르시아의 사제들, 초자연적인 지식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 마술사들, 그리고 기만하거나 유혹하는 사람 등 여러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천체들의 운행을 관찰함으로써 세상사를 예측하고, ‘별’을 보고 새로운 임금의 탄생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동방이 어디인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를 보면 유배 뒤 바빌론에 상당수의 유다인이 정착해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여 바빌론, 페르시아가 유력하다고 본다. 만일 천문학이 발달하고 문화가 융성했던 페르시아가 유력한 동방이라면, ‘박사’들은 낙타를 타고 사막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들의 지적 호기심이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향해 고국을 떠나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여행한 것을 보면 그들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별은 밤하늘에 보이는,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말한다. 천문학자 마크 키저는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독수리자리 DO’라는 이름의 별이며, 아마도 동방박사들이 그 당시 천계의 목성, 토성, 화성 행성들의 몇 번의 결집을 보고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곧, 목성은 왕의 행성이며 동시에 자비로운 행성이지만, 토성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행성이고, 화성은 전쟁을 상징하는 행성이다. 그러므로 목성과 토성의 만남은 위대한 지도자(메시아)가 태어나서 사악한 지도자(로마 황제)를 물리치는 것으로 말이다(「베들레헴의 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해석은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별이 머무른 곳에 아기가 있었다
생각건대 박사들의 등장에 가장 놀란 사람은 자신의 가문이 아닌 ‘새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현직 임금 헤로데였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처럼 헤로데는 권력에 대한 편집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왕좌를 위해 그와 결혼했던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비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자식까지도 죽였다. 또한 말년에는 왕위 계승자 안티파테르를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데 ‘새 임금이 탄생한다니!’ 꿈이 다시 등장하고 박사들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 목적인 별이 머무른 곳, 곧 ‘아기가 누워있는 곳’을 찾아 아기와 그의 부모를 방문한다. 루카는 이 방문이 목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브라운 신부에 따르면, 목자들은 그 당시 사회적 변두리 인생들이었다(「메시아의 탄생」).
아기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유다 임금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배경으로 기술한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2,1)라고 말이다.
기원전 31년 이오니아 바다에서의 악티움 해전은 역사를 바꾸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라틴어 칭호 ‘아우구스투스(Augustus)’, 곧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탈바꿈한 로마제국의 황제는 군사, 경제, 정치의 힘을 가진 사람이다. 동시에 구원자, 해방자, 구세주로 불린다. 그러나 루카는 대담하게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신적인 존재는 구유에 누운 이 아기라고 말한다.
박사들과 목자들의 방문을 받은 요셉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구세주를 구유에 눕힐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사람이지만 마음 깊이 위안과 하느님의 섭리를 느꼈을 것이다. 요셉에게 이 방문은 인생에서 가슴 깊이 새겨질 몇 개의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이 가장이며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더 깊이 느끼게 된 날인 듯싶다.
여기서 잠깐 요셉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오랫동안 교회는 예수의 유년기 사건들에 대한 마리아의 숙고하는 태도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마태오와 루카의 유년기 설화를 깊이 읽어보면 요셉이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행간의 의미로 그의 진지하고 묵직한 성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참으로 그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아닌 조용하게 통합을 끌어내는 새 시대의 남성의 모범적인 사람으로 말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런데 내 마음이…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리 인근 세포리스 도시를 재건할 때 요셉은 목수로서 일자리를 얻어 가정을 이끌어갔을 것이다. 아버지의 위상을 다시 찾고자 노력하는 현대와 달리 그 시대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는 시기였다.
가부장 시대에 아버지는 아이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세워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요셉도 여느 아버지들처럼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누구의 말처럼 남자는 아버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로 열두 해를 살았던 요셉에게 신이 자신에게 맡기신 아이가 사라졌다. 유월절이 오면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몰려온 유다인들로 북적였고, 해마다 순례를 한 예수는 당연히 같이 간 친척들의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되돌아간 예루살렘, 성전뿐만 아니라 도시의 시장들과 골목길을 찾아다니느라 사흘이 소요되었다.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고통과 공허감을 안고 다시 성전의 여러 뜰을 지나가다가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차마 무어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순간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니?’ 하는 가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말이 아이한테서 되돌아 왔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예상하지 못한 아이의 대답에 요셉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맞다. 내가 아버지가 아니지.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라고 말이다. 요셉이 출생의 비밀을 알려줄 그 시간까지 예수는 기다리지 않았다. 서로가 너무나 어색했을 정적의 시간, 마리아는 더 당황했을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성가정이 문제가 없고 거룩함과 기쁨으로 충만한 이상향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착각이다. 성가정이 살았던 시대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힘과 권력의 시대였기에 유다인에게는 고통과 혼돈의 시대였다.
성가정은 그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해서 세상살이의 어려움에서 면제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양부로서 요셉의 소명은 안팎으로 결코 녹록지 않은 인생이었을 것인데도 그는 늘 역사에 부드러움과 깊은 침묵을 보여준다. 성가정은 하느님 안에서 가족 구성원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서로에게 일깨워주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가정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등 세상의 어려움을 사는 우리에게 요셉 성인의 인고의 삶은 마음에 고요한 깊은 파문과 용기를 준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시시의프란치스코전교수녀회 수녀.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허귀희 클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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