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말씀 단상: 하느님 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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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2-28 | 조회수6,578 | 추천수1 | |
[말씀 단상] 하느님 나라 (1)
다른 문화와 사상을 경험한다는 건 기존의 삶에 대한 반성이나 고민을 불러올 경우가 있습니다. 제 경우엔 프랑스 리옹에서의 삶이 그러한데, 학교를 오가는 길에 자주 만났던 리옹 주교좌성당 앞 노숙인과의 시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주무시기 춥지 않으세요?” “여기가 어때서?” “그래도 따뜻한 곳에 가서 제대로 쉴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
저와 노숙인 사이에 몇 번 주고받던 짤막한 대화입니다. 잘 먹고, 잘 씻고, 무엇보다 잘 잘 수 있는 삶이 주교좌성당 앞 노숙인들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제 생각은 매번 대화를 나눌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 삶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노숙인들은 그야말로 사회적 ‘루저’들인 셈이지요. 아마 그 노숙인은 저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노숙인과의 대화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말… 기존의 제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준거가 어디에 있는지 되묻게 하는 말이고, 만약 그 준거가 하느님의 뜻과 자연스럽게 상응하지 않는다면 다시 제 삶을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현대적 국가 개념, 곧 영토와 백성과 국권의 틀로 이해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나라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α)’인데, 임금이나 지도자의 통치권을 가리키는 말마디입니다. 이를테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는 이, 대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마태오 복음의 진복팔단에 보면 하느님 나라를 얻어 누리는 이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마태 5,3)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마태 5,10) 흔히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두고 유다 사회의 ‘아나윔(가난한 자들)’ 전통을 언급할 때가 많습니다. 제 삶을 오롯이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방향지운 이들을 ‘아나윔’이라 합니다. 예컨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고, 신약의 시메온과 한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서의 처지가 어떠하든, 그것이 가난이든 박해든 간에, 하느님의 뜻에 한 인생을 내어 바친 이들의 것입니다. 세상 안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다보면 숱한 박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많지요. 타협이 아닌 정직과 성실, 그리고 진리를 위해 산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쉽지 않으니 그 삶이란 게 대부분 가난과 박해를 업보처럼 짊어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 역시 그런 ‘아나윔’으로 살아 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노력들은 교회 역사 안에 끊임없이 등장했지요. 복음을 전하는 데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로부터 일상의 소소한 기도문을 빠뜨리지 않고 되뇌는 사람들까지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를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가난 속에서, 가난을 살면서 증거 되고 선포되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내야 하는 게 하느님 나라라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내일 혹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염두에 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4)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간혹 신앙한다는 것을 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아직 참아내야 할 시간, 희생과 봉사로 먼 훗날 하느님 나라 입성을 위한 티켓을 확보하는 시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엔 아직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았으니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셨고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 덕택에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았다 생각하는 건 예수님의 공생활을 가벼이 여기는 게 아닐런지요.
하느님 나라가 아직 이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자세는 마치 노숙인을 저의 삶의 잣대로 함부로 대했던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건 아닐까 합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배고프고 억압받는 이들이 있고, 여전히 부조리에 희생당하고 불의에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멀었다는, 그래서 나라도 외치고 저항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는 참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이른바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올법한 영웅주의적 태도말입니다. 하여, 노숙자의 말로 다시금 되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하느님 나라는 세상이 원하는 형태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에 구원을 이루셨지요. 신앙인은 세상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 가난하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지금을 우리 신앙인의 삶으로 증거한다면, 그것이 이미 하느님 나라를 이미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행복하고 보다 평화롭고 보다 윤택한 삶을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진대, 우린 왜 매번 ‘보다 나은 내일’을 전제로 지금의 부족함을 제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기 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것이 내 눈에 하찮고 부조리하게 여겨지더라도 먼저 사유하고 묵상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마태 18,4.10)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마르 4,26-29) 이 세상이 불의하고 부조리가 가득 차 보이는 것은 이미 하느님의 섭리대로 선하고 정의롭고 조화롭게 창조된 이 세상의 질서를 우리 사람들이 소홀히 한 때문이지 하느님 나라 자체가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불의와 부조리 속에서도 저절로 자라나고 있습니다.(마태 13,24-30) 올바르게 살다가 가난해지고 박해받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지요. 현실을 이러쿵저러쿵 비난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재단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본디 인간됨과 본디 지켜야 할 것과 본디 행해야 할 것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합니다. 교회는 불의에 항거하는 영웅들의 투쟁 장소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당신 뜻대로 머무시도록 준비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건설해야 할 무릉도원이 아니라 창조 때의 본 모습으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본디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멋지게 만들어 놓은 본래의 나를 내팽개치고,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건 없는지,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이 세상의 논리에 저당 잡혀 사는 건 아닌지 자문하는 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시작합니다. [월간빛, 2017년 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말씀 단상] 하느님 나라 (2)
“너희 나라 교회는 어때?”, “뭐…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저는 잠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두서없이 말하기보단 정연한 자랑이 되기 위해서 급하게 머리를 굴리느라 말을 머뭇거렸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요…” 이어지는 말들은 꽤나 길었고 길어서 허둥대며 끝이 났습니다. 마무리는 이러했습니다. “그래도, 프랑스 교회와 비교도 안 될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라 아직 신앙의 깊이는 얕은 것 같아요.” 미소 띤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던 프랑스 리옹교구 성소담당 신부님은 갑자기 자세를 달리 하시더니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인데, 한국 교회의 신앙에 대해 평가하니? 넌 그럴 권한이 없어.”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당연히 필요하겠지요. 대개 하느님의 뜻을 세상과 다른 곳에서 가능한, 고결하고 거룩하여 어지러운 세상과는 차별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속에서 형성된 윤리 도덕적 기준이나 관습적 잣대를 준거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신자라면 공손하고 인자하고 예의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생활양식이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 말입니다. 세상과 차별적인 것을 추구하되 세상이 만든 정연한 준거와 규칙들을 따라 사는 것, 그래서 세상 안에서 ‘칭찬’ 듣는 것을 신자의 품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몇 가지 질문들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그토록 당연시되었던 안식일을 어기고, 죄인과 어울려 먹고 마셨을까?”, “예수님은 왜 당시 사회의 윤리와 관습의 준거집단인 사두가이, 바리사이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셨을까?”
하느님의 뜻이 육화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삶이, 그 규칙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다시금 되돌아보는 데 소용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그렇다’, ‘모두가 맞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라는 논리는 합리적인듯 하나 때론 얼마간의 포기와 타협을 전제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외치신 건 포기와 타협으로 점철된 세상의 주류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 생각이, 제 판단이, 제 가치관이 옳다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외치고 이 세상에 저항하신 이유는 ‘조화’에 있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구별되어 질서정연한 세상을 원하셨지요. 빛이 생겨 어둠과의 조화를 이루어 창조의 하루가 완성되었습니다.(창세 1,5) 하루의 완성은 이틀, 사흘째 날로 이어져 공간의 구별을 만들어내고 각 공간마다 고유한 생명체들이 제 종류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창세 1,25)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생명체들은 저마다 가진 제 색깔을 뽐내며 ‘다름의 향연’을 펼치는 게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본디 모습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성서학자 뽈보샹은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이렛날을 가리켜 ‘하느님 절제의 시간’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이렛날에 빗대어 묘사하고자 한 것은 유다 사회의 안식일인데, 히브리말로 ‘싸밧’이라고 합니다. 흔히 안식일이라 하면 ‘쉼’을 떠올릴 텐데, 사전적 의미는 ‘중지’입니다. 일을 잠시 멈추신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들의 조화를 감상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 멈추시는 건, 우리 역시 멈추고 주위를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신명 5,14-15) 내가 쉬어야 너도 쉬고, 서로가 쉬면서 서로의 다름이 얽히고설킨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는 사회 분위기가 읽힙니다. OECD 회원국들 중에 한국의 노동시간이 멕시코 다음으로 많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바쁘게 움직이고 쉼 없이 내달리며 끝없이 경쟁해야 살아남는다는 다소 씁쓸한 현실을 경험칙으로 감내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라 일컫는 경쟁 체제는 경쟁력이 없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 ‘실패한 사람’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사회 하층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의 속내를 찬찬히 살펴보면 부끄럽게 고백해야 할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지요.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은 윤리 도덕적인 혹은 율법적인 일탈을 꾸짖고 반듯하고 성숙한 사회구성원의 품위를 회복시키자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빴던, 도무지 멈추고 사색하거나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갈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그래서 안식일조차 지킬 수 없었던 소시민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사회적 주류로부터 소외되어 사회적 권리조차 박탈된 이들, 목자, 어부, 소작농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도 사람이고, 사람다워야 하고,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의 가르침과 치유로 설파하셨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그 어떤 자리든, 어떤 생명체든 제 종류대로 그 가치의 고귀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태초의 하느님 뜻을 다시 일깨우신 것이지요.
하느님이 남자인 아담을 두고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여자인 하와를 만들어 내실 때, 그 둘의 관계를 ‘알맞은 협력자’라고 규정하셨습니다.(창세 2,18) 히브리말로 ‘알맞다’는 것은 ‘네게드’라 합니다. 알맞게 돕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알맞다’의 의미를 두고 눈높이를 맞춘, 그래서 서로가 뜻을 같이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알맞다’는 히브리말 ‘네게드’는 ‘~~ 앞에’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풀어 말하자면, 내 앞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있는 게 아니라 너도 있으니 서로 다름을 보듬어야 한다는 게 ‘알맞은’ 것입니다. 하와가 만들어질 때 아담은 깊은 잠에 빠졌지요.(창세 2,21) 하와와 한 몸이 되어 하와에 대해서, 그녀의 다름에 대해서 전혀 알길 없다는 사실이 깊은 잠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모릅니다.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모르는 게 있고, 모르기에 서로 알아가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 노력이 행여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재단되거나 설계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정의롭고 선하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린 민감해야 합니다. 예전 유학 시절 리옹교구의 성소담당 신부님 말씀은 여전히 제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인데, 한국 교회의 신앙에 대해 평가하니? 넌 그럴 권한이 없어.” 일상을 살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비교와 판단으로 이웃을 재단하는 버릇이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뜻을 훼손하고 있다는 반성이 꽤나 무겁게 다가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서 당신의 용서를 구하고, 당신의 자비 안에 의탁할 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겸허함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웃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입니다. [월간빛, 2017년 3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말씀 단상] 하느님 나라 (3)
프랑스 유학길에 오를 때,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프랑스 말은 ‘메르시 보꾸(merci beaucoup)’였습니다. ‘매우 고맙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이 ‘멸치볶음’과 발음이 비슷한 게 우습기도 하고 멸치볶음을 싫어한 저로선 ‘메르시 보꾸’를 되뇌며 괜히 ‘프랑스 싫어!’라고 우겨보기도 했습니다. 낯선 유학생활이 두려웠던 게지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무렵, 저는 프랑스 리옹 근교의 작은 본당에서 환송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자분들은 이제 제 나라로 돌아가는 동양의 얼굴 납작한 신부를 눈물로 보내주었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정이 생기니 정 떼기가 힘든 건 동양이든 서양이든 매한가지였습니다.
“처음 제가 프랑스 올 때 알았던 말이 ‘메르시 보꾸’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갈 무렵, 신자 분들의 눈은 저를 향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서툰 프랑스 말 발음이 성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떠나는 지금, 다시 ‘메르시 보꾸’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프랑스의 자유에 대해 ‘메르시 보꾸’, 프랑스의 평등 정신에 대해 ‘메르시 보꾸’, 프랑스의 형제애에 대해 ‘메르시 보꾸’입니다.” 잠시 박수가 이어졌고, 저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자유, 평등, 형제애를 꼭 살겠습니다. 그게 제가 공부한 성경말씀의 정신이기도 하니까요.”
자유, 평등, 형제애는 프랑스 혁명 정신입니다. 왕이 다스리던 봉건시대를 민중의 힘으로 끝을 낸 것이 지금의 프랑스입니다. 저는 프랑스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소시민의 자세를 다시 되짚어 보곤 합니다.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적어도 내가 혼자 살지 않는다는 생각, 내가 더 움켜쥐면 누군가는 덜 움켜쥘 수밖에 없고, 또 누군가는 아예 가진 것마저 뺏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게 프랑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떠올리면 선물로 받을 상당한 기쁨과 영광, 혹은 넉넉함 정도를 많이 떠올리곤 하지요. 문제는 ‘내가’ 받는 것에 ‘당신’이 받을 게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돈도 좀 벌고, 성공도 좀 하고, 떵떵거리지는 못하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픈 생각은 얼마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6.10절을 읽어보면 이런 생각은 조금 손질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나’ 위주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낯설거나 불편한 생각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선도 쌓고, 덕도 쌓고, 그리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 같은데, 가난을 사는 건 왠지 거북한 것이지요.
대개의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자고 하면 좋은 일이라며 함께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을 살자고 하면, 그건 이미 가난한 이들의 몫이라 여기고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에게 제 이익과 재산, 그리고 명예를 일정부분 지켜나가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가끔씩 사회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분들이 하시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때론 그 일에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나 비판적 생각을 보태면 배타적 자세를 견고히 하시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원래 돈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권력이 되었건 그 가치에 대해 갈망하며 사는 존재니까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갈망을 버려야 한다고 스스로 채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갈망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우도 있지요. 갈망 자체를 놓고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주어진 우리 본성의 민낯입니다. 다만, 갈망이 어디를 향하는가는 두고두고 살펴보고 수정하고 다시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시편 2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을 건진 인생에 굳이 ‘내 것’이라고 고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데서 우리의 갈망을 설계하는 게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온유하다는 그리스말 ‘프라우스(πρα)’는 물질적 가난을 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겸손으로 번역된 그리스말 ‘타페이노스(ταπειν)’ 역시 윤리적 덕목으로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삶의 태도만이 아니라 밑바닥을 사는,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힘도 권력도 명예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의 자리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고, 스스로 낮추임의 자리를 갈망하신 것입니다. ‘나’를 살기 위해 사신 게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뛰어넘는 강력한 갈망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난을 사는 이들을 위해 수많은 선물을 안기기는 해도 스스로 가난해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우리가 가난해지려고 작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건 뭔가 모순된 일이기도 하고, 도무지 힘든 일이라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늘 주저하며 성당에 가고 레지오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러 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사신 것은 가난 자체를 목적으로 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을 만들어 낸 이들,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사회를 비판하고, 그런 사회에서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이들과 친구가 되셨기 때문에 가난해지셨습니다. 이른바 ‘입바른 소리’를 하면 세상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테고, 그 괴롭힘은 대개 현실적 가난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돈에 대한 미련도, 권력에 대한 욕구도, 명예에 대한 욕망도 모두 내려놓고 방에만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이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가지지 못한 이들처럼 헐벗고 목마르고 배고프다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없이 사는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게 신앙적인 것도 아니고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또 가르치실 때에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시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하던 어린이가 오는 걸 막지 않으셨고, 죄인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모두가 ‘너’를 향한 갈망이었고, 그 갈망 덕택에(?) 예수님은 가난해지셨고, 급기야 수난과 죽임까지 받게 되셨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프랑스를 떠날 때 ‘메르시 보꾸’는 처음 프랑스에 발을 디뎠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메르시 보꾸’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유학 내내 힘들었지만 뭔가 이루어냈다는 기억, 아팠지만 가슴 한 켠에서 올라오는 따뜻함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프랑스 신자들의 자유, 평등, 형제애에 대한 기억이 ‘메르시 보꾸’라는 짧은 말마디 안에 흠뻑 녹아있었던 것입니다. 자유는 나를 떠나 너를 향하는, 너를 통해 새로움을 얻어 누리는 새로운 창조의 행위를 가리키고, 평등은 나만 잘나고픈 갈망을 너와의 연대를 통해 같이 폼 나게 살아보자는 것이며, 형제애는 어떠한 처지에든 함께할 것이라는 자비의 마음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시작에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건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를 실천할 자리가 바로 당신 안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갈망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월간빛, 2017년 4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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