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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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2-28 | 조회수5,980 | 추천수1 | |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1)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은 광야를 방황한다. 영적 구심점은 계약 궤였다. 야훼께서 말씀하는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궤 안에는 모세의 십계 판이 있었다(1열왕 8,9). 만나를 담은 그릇과 아론의 지팡이도 있었다고 한다(히브 9,3). 성막은 계약 궤를 모신 천막이었을 뿐이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계약궤를 실로(Shiloh)에 모셨고(여호 18,1) 판관 시대에도 그곳에 있었다(판관 18,31). 자연스레 실로는 신앙과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왕이 된 다윗은 계약 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정치적 통합은 이뤘지만 실질적 통합은 이제 시작이란 것도 알았다. 지파 간 갈등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계약 궤를 항구히 모실 장소를 구상한다. 그곳에 성전을 지어 민족의 일치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예루살렘이 최고의 장소로 떠올랐다. 다윗은 즉시 움직인다. 7년 간 거주했던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왕궁을 옮긴 것이다. 수도의 이동이었다. 반발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다윗은 기일을 택해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셨다.
사무엘기 하권 6장은 계약 궤를 옮기는 기록이다. 군사 삼만 명이 동원된다. 이렇듯 많은 인원이 소용되는 건 아니다. 일종의 전시효과(퍼포먼스)였다. 아직도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사울에 대한 미련 역시 여전히 팽배해 있었다. 예루살렘 여부스족 귀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계약 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다윗은 뛰며 춤추었다고 전한다. 그 장면을 미칼이 비웃었다는 기록도 함께 있다(2사무 6,16). 미칼은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이다. 다윗은 말한다. ‘주님께서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셨소.’ 사울 왕조에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은 미련을 접으라는 암시다.
원래 예루살렘 땅엔 가나안 원주민(창세 10,15) 여부스(Jebus)족이 살고 있었다. 난공불락 천연 요새였기에 여호수아도 점령 못 한 곳이었다(여호 15,63). 다윗은 지하수로를 통해 잠입에 성공했다(2사무 5,8). 산 위의 도시였기에 식수 공급을 위한 갱도가 있었던 것이다. 점령 후 다윗 성이라 불렀고 예루살렘으로 개명되었다. 다윗 시대엔 2,000명 정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밧 세바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성전 건립은 솔로몬이 완성한다. 워낙 많은 재정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다윗은 준비하는 운명이었고 결실은 그의 아들 솔로몬 몫이었던 셈이다. [2017년 2월 26일 연중 제8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2)
다윗은 예루살렘 동쪽에 계약 궤를 모신다. 모리야(Moriah) 언덕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창세 22,2). 원래 이 지역엔 여부스족이 살았고 그들 말로 시온(Zion)이라 했다. 요새란 뜻이다. 다윗은 이곳을 점령한 뒤 성벽을 보완하고 살았던 것이다. 다윗성이다. 훗날 예루살렘 성전도 이곳에 선다. 시온 산자락 모리야 언덕이다. 이렇게 해서 시온은 성전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이사 18,7). 이후 예루살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 되었고 시오니즘의 어원이 되었다.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3)
[성경의 세계] 다윗과 예루살렘 (4)
예루살렘 제2성전은 헤로데 때 화려하게 증축된다. 뛰어난 정치력으로 37세에 유대 왕이 되었고 40년간 통치한 인물이다. 하지만 유대인이 아니었다. 출생 콤플렉스 극복을 위해 마카베오 가문의 미르얌 공주와 재혼했고 성채와 공공건물을 많이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도 손댔다. 작업은 기원전 20년에 시작해 46년간 계속되었다. 솔로몬의 제1성전을 능가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탄생시켰다.
헤로데는 성전 터를 2배로 넓혔고 성벽도 이중으로 쌓았다. 광장에서의 집회도 허락했고 이방인 출입과 장사도 허용했다. 그러면서 광장 안쪽에 담을 쌓아 유대인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잡인의 접근을 막아준 것이다. 성전은 다시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고 유대인 최고 법정 산헤드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66년부터 시작된 유대 독립전쟁은 헤로데가 심혈을 기울였던 성전을 초토화시켜 버린다.
70년 티투스가 이끌던 로마 군대는 성전에서 결사 항전하던 유대 독립군을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성전은 ‘돌 위에 돌이 얹혀있지 못할 만큼’ 심하게 파괴되었다. 남은 것이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성벽 일부다.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너진 성전에 유피테르 신전을 지으려 했다. 유대인은 강하게 반발했다. 2차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하지만 4년 만에 진압되고 예루살렘은 다시 파괴되었다. 황제는 유대교를 법으로 금했다.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면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이후 유대인의 해외 떠돌이가 본격화되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 산위의 도시다. 북쪽만 교통수단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계곡에 싸여 있다. 동쪽계곡이 키드론 골짜기고 남쪽과 서쪽은 힌놈계곡이다. 성벽과 성문은 북쪽 길에 있었다. 현재는 신(新)시가지가 성벽까지 닿아있다. 성안에는 구(舊)시가지가 예전부터 있었고 요르단에 속했다. 신시가지만 이스라엘 땅이었다. 따라서 성 밖 신시가지 주민은 성탄과 부활절 외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1967년 중동전쟁(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점령하곤 자국 영토로 선언해버렸다. 이후 양쪽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졌다. 예루살렘은 성경의 무대다. 그런 이유로 순례와 관광이 늘 이루어지고 있다. 유대인에겐 여전히 정신적 고향이다. 무슬림에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기에 메카와 동등한 성지로 인식하고 있다. [2017년 3월 19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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