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호데쉬 - 달, 새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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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3-14 | 조회수6,399 | 추천수1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호데쉬: 달, 새것 사라졌다 다시 차오르듯, 태초 가르침은 반복된다
- 호데쉬. 본디 밤하늘의 초승달을 의미했지만, ‘초하루’ 또는 (시간적 의미의) ‘달’을 뜻하게 되었다.
호데쉬는 달(月)을 의미한다.
초승달이 뜨는 초하루
밤하늘의 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여럿이다. 그 가운데 호데쉬는 본디 ‘초승달’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밤하늘의 달을 가리키는 의미는 퇴색했다. 호데쉬는 초승달이 뜨는 날, 곧 ‘초하루’나, 초하루와 초하루 사이의 기간, 곧 ‘시간적 의미의 한 달’을 의미하는 낱말로 변했다. 호데쉬는 구약성경에 280번 이상 등장하는 친숙한 낱말이다. 우리말의 ‘달’이나 한자의 ‘월’(月)도 본디 밤하늘의 달을 가리켰지만, 훗날 시간적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서로 쓰임새가 닮은 말이다.
그믐이 되어 밤하늘에 달이 사라지면 아주 컴컴해진다. 그런데 손톱만큼 달이 보이기 시작하는 날, 곧 호데쉬가 뜨는 날은 초하루로서, 고대 근동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절기였다. 고대 이스라엘도 이런 고대 근동의 ‘초하루 풍습’을 공유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초하루 풍습
사실 구약성경에는 호데쉬(초하루)와 관련된 일들이 많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기서는 두 가지만 보겠다. 첫째는 다윗 이야기이다. 요나탄은 다윗을 “목숨처럼 사랑”하여(1사무 20,18), 다윗을 살려주었다. 한 번은 요나탄이 다윗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재촉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일은 호데쉬(초하룻날)이니, 자네 자리가 비면 아버지께서 자네를 찾으실 걸세”(1사무 20,18). 이 말로 미루어, 고대 이스라엘의 왕실에서는 호데쉬(초하루)에 특별한 식사나 의례를 행하였다고 짐작한다. 필시 참가자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요나탄은 아버지 몰래 다윗에게 살 길을 알려준 셈이다.
- 하다쉬. 호데쉬의 어근으로서, 동사로 쓰이면 ‘새롭게 하다’,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동사원형을 표현할 때는 위처럼 어근만 적지만 관습적으로 ‘아’(a)를 넣어 읽는다. 그러므로 위 글자는 ‘하다쉬’로 발음한다.
둘째는 레위인 이야기이다. 레위인의 조직과 임무를 상세히 규정한 역대기 본문을 보면, 레위인들은 “안식일과 호데쉬(초하룻날)와 축일에”(1역대 23,31) 번제물을 바치고, 법규에 따라 정해진 역할을 맡았다. 이 규정을 보면, 호데쉬(초하룻날)는 안식일보다는 못하지만, 일반적인 축일과는 구별되는 중요한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움
호데쉬에서 모음만 살짝 바꾼 하다쉬는 형용사로서 ‘새로운’이란 뜻이다. 탈출기 첫머리에는 이스라엘 사람 요셉을 알지 못하는 “하다쉬(새) 임금”이 등장했다는 보고가 나온다(탈출 1,8). 그는 이스라엘인을 핍박할 파라오였다. 엘리야 예언자를 잇는 엘리사는 어느 날 성읍의 물이 나쁘다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하다쉬(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하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하느님은 결국 물을 되살려주셨다(2열왕 2,19-22). 이렇게 하다쉬는 ‘새롭다’는 의미로 사람이나 사물에 쓰이는 말이다.
- 하다쉬. 형용사로서 ‘새로운’, ‘신선한’을 의미한다. 호데쉬(달)와 어근이 같다.
진면목이 드러나는 새로움
그런데 호데쉬와 하다쉬의 관계를 잘 보면, 구약성경에서 ‘새로움’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깨달을 수 있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새롭다는 것은 마치 한 달에 한 번씩 새 달이 뜨는 것과 같다. 새로 뜨는 달은 사실 한 달 전에 떴던 바로 그 달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새롭게 드러날 뿐, 달의 본질은 그대로이다. 다만 새로운 맥락에서 새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다.
주님의 거룩함을 예로 들어 보자. 하느님의 거룩함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태초의 창조와 이집트 탈출 사건과 시나이 산의 계약 등에서 이미 거룩함이 완전하고 충분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앞으로 새롭게 드러날 거룩함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족한 인간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죄에 빠진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함께 역사를 함께 하시면서 자애로운 부모님처럼 계속해서 하다쉬하게(새롭게) 가르쳐 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하다쉬(새) 가르침은 사실 태초의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다. 하다쉬의 이런 의미는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예수님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하다쉬(새) 모습이면서 동시의 그분의 본디 모습, 곧 진면목이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3월 12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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